필리버스터는 '검수완박' 법안 통과를 막을 수 있을까?

탁지영 기자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검찰청법 개정안 반대를 위한 무제한토론 첫 주자로 나섰다. 연합뉴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지난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검찰청법 개정안 반대를 위한 무제한토론 첫 주자로 나섰다. 연합뉴스

검찰 수사·기소권 분리 법안(검찰청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이 지난 27일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면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정국이 막 올랐습니다. 국민의힘은 본회의 개의와 함께 검찰청법 개정안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신청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과 박병석 국회의장이 4월 임시국회 회기를 27일 자정으로 변경하면서 무제한 토론은 6시간48분 만에 끝났습니다. 토론에 나선 여야 의원은 권성동(국민의힘)·김종민(민주당)·김웅(국민의힘)·안민석(민주당) 4명이었습니다.

무제한 토론은 소수당이 다수당의 입법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입니다. 다수당의 입법 강행을 막기 위해 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수단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 동의안 처리에 반대하기 위해 5시간19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발언한 일이 대표적입니다. 무제한 토론은 한 차례 폐지되기도 했습니다. 1973년 2월 국회법을 개정하며 의원 발언시간을 30분 내로 제한했는데, 무제한 토론을 원천 봉쇄한 것입니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국회법 개정)이 도입되면서 무제한 토론이 부활했습니다. 2016년 2월 테러방지법에 대한 민주당의 무제한 토론은 ‘필리버스터 정치’의 서막을 새로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정의화 당시 국회의장이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이 낸 테러방지법안을 직권상정하자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처리에 반대하며 무제한 토론을 신청했습니다. 첫 발언자는 민주당 초선이었던 김광진 의원이었습니다. 김 의원은 5시간32분 동안 발언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을 깼습니다. 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의원 38명이 장장 9일에 걸쳐 192시간 25분 동안 테러방지법안이 통과돼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파했습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토론 발언자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발언자였던 이종걸 민주당 전 의원은 12시간 31분 동안 발언하며 당시 국내 최장 기록을 세웠습니다.

9일 간의 무제한 토론에도 테러방지법안 통과를 막지 못했지만 시민들의 관심은 뜨거웠습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올랐습니다.

20대 국회에선 공수가 바뀌었습니다.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이 2019년 12월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안을 두고 무제한 토론을 신청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이 그 해 12월23일 공직선거법 개정안 처리를 막기 위해 무제한 토론을 신청했습니다. 이번엔 야당뿐 아니라 여당도 나섰습니다. 여야 의원 15명이 총 50시간11분 동안 찬반 토론을 벌였습니다. 예전과 달리 필리버스터 정치의 파급력을 체감했던 여야가 반대 토론뿐 아니라 찬성 토론에도 나선 것입니다.

민주당은 ‘회기 쪼개기’ 방식으로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강제 종결시켰습니다. 국회법상 무제한 토론은 회기가 종료되면 자동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를 이용해 당초 공고된 회기를 단축해 무제한 토론을 무력화시킨 겁니다. 무제한 토론이 종결된 법안은 다음 회기에서 바로 표결해야 합니다. 자유한국당은 그 달 27일부터 공수처 설치법안에 대해 무제한 토론 2차전을 벌였지만 이 역시 28일 자정 회기 종료로 자동 표결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21대 국회에선 2020년 12월 국민의힘이 공수처법, 국가정보원법, 남북관계 특별법 개정안 등에 대해 무제한 토론을 신청했습니다. 여야 21명이 토론자로 나서 그 해 12월9일부터 6일 동안 총 89시간 5분간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윤희숙 당시 국민의힘 의원이 12시간47분 동안 발언해 종전 이종걸 전 의원이 세운 헌정 사상 최장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민주당은 국가정보원법과 남북관계 특별법 개정안 무제한 토론을 끝내기 위해 각각 180명, 187명의 종결 동의서를 모았습니다. 국회법상 재적의원 5분의 3(180명)이 무제한 토론을 끝내는 데 동의하면 토론은 자동 중단되고 표결해야 합니다.

양당제가 공고한 한국 정치에서 무제한 토론은 실제 법안 처리를 막기보다 여론전 수단으로 활용되곤 합니다. 앞선 세 차례 사례를 봐도 회기 나누기, 토론 중단 동의서 제출 등 다수당이 무제한 토론을 강제로 중단시킬 수 있는 수단도 갖고 있습니다. 본회의 출석 의원 과반수가 찬성하면 법안이 통과되기 때문에 표결 절차로 가면 수적 우위를 가진 다수당을 막을 순 없습니다. 이 때문에 무제한 찬반 토론이 표결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일각에선 다당제 정치 상황이었다면 다양한 의견들이 무제한 토론을 통해 나오고 이것이 의원 개개인의 표결로 표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합니다.

이번 검찰 수사·기소 분리 법안을 두고서 펼쳐진 무제한 토론도 여론전 성격을 띱니다. 여야 합의를 번복하며 법안 상정을 막은 국민의힘과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민주당이 각각 정당성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무제한 토론이 종결된 검찰청법 개정안은 오는 30일 본회의에서 표결 처리됩니다. 국민의힘은 같은날 박병석 국회의장이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상정하면 무제한 토론을 다시 신청할 예정입니다. 민주당은 회기 나누기 방식으로 무제한 토론을 강제 종료한 뒤 다음달 3일 본회의를 열어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최종 통과시킬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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