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1년

러시아에 다 걸고 핵 폭주…외교적 승자는 북한?

박광연 기자
북한이 건군절(인민군 창건일) 75주년인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건군절(인민군 창건일) 75주년인 지난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개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유럽에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난 1년간 동북아시아 정세도 뒤흔들었다.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정당화하며 핵무력을 급속히 고도화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북한은 미국과 대립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비호로 추가 제재를 회피하는 등 핵 개발의 호기를 맞았다. 이번 전쟁을 통해 가장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 국가는 북한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북한은 ‘신냉전’을 주장하며 러시아에 바짝 밀착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아시아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라 부르는 한·미·일 협력을 바탕으로 한 군사 블록 형성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크라전 이후 ‘북핵 폭주’

러시아가 지난해 2월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부터 북핵 위기는 급격히 심화됐다. 전쟁 발발 한달 뒤인 지난해 3월24일 북한은 동해상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며 서막을 열였다. 2018년 4월 선언한 ‘핵실험·ICBM 발사 모라토리엄(유예)’을 약 4년 만에 파기했다. 지난해 9월 핵 선제공격을 시사한 핵무력 법제화 선언, 10월 전술핵 운용부대 훈련, 11월 화성-17형 ICBM 발사 그리고 이달 열병식에서 고체연료 ICBM 공개 등 핵무력 고도화 작업이 계속됐다.

북한이 지난해 11월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도 아래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해 11월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도 아래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런 움직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연합(소련) 해체 당시 핵을 포기한 결과 ‘제국주의적 침략’을 당했다고 판단한 북한이 핵 보유에 더욱 집착하게 됐다는 것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힘이 없으면 우크라이나 같은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보고 대미 핵무력 개발의 정당성을 강화했다는 시각도 있다.

외교적 활로 찾는 북한

국제사회 각종 제재로 고립된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외교적 활로를 다소 확보했다. 우크라이나 땅에서 미국과 대리전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는 반미 국가인 북한과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도 북한에 더욱 우호적으로 다가왔다. 북한의 전략적 가치와 위상을 재평가한 셈이다.

전통적인 우방국이지만 북핵 개발에 부정적이었던 중·러는 과거의 태도를 바꿨다. 국제사회의 대북 추가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것을 넘어 서방의 제재를 적극 저지하고 있다. 지난해 북한 ICBM 발사 등을 계기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의 제재가 추진됐지만 상임이사국인 중·러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현승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전쟁으로 가장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 나라는 북한”이라며 “중·러가 거부권을 행사해주니 유엔 안보리 차원의 (북한 규탄) 의장 성명조차도 미국과 서방이 마음대로 못하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3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병합을 기념해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3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병합을 기념해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러라는 든든한 뒷배는 북한의 핵 개발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1일 미·러 핵무기 통제 조약인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선언하는 등 핵 위협을 강화하는 상황은 북한에 힘을 싣는 것으로 평가된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러시아가 핵 사용을 시사하며 1968년 구축된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며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북한에는 호재”라고 말했다. 북한은 1993년 NPT를 탈퇴했다.

“러시아와 한 전호” 전폭 지지

북한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옹호하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국가들 중 하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달 미국과 서방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탱크 지원이 결정되자 “우리는 로씨야(러시아) 군대와 인민과 언제나 한 전호(참호)에 서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 연구위원은 “친러 성향이 강한 벨라루스나 이란도 러시아와 한 전호에 있다는 얘기는 안한다”며 “북한의 메시지는 러시아에 다 건다는 뜻”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은 지난해 7월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 점령지에 세워진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북한은 전쟁 1주년 하루 전인 23일에도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미국과 서방의 패권주의 정책이 로씨야로 하여금 선제적인 군사 행동에 나서도록 떠밀었다”며 “미국은 저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적대 국가들은 물론 동맹국의 안전과 이익도 서슴 없이 침해하고 있는 악의 제국”이라고 러시아를 옹호했다.

북한이 중국 중심의 외교에서 러시아로의 다변화를 시도하는 움직임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전쟁을 계기로 정치·경제 등 다방면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의 친선 관계를 과시하지만 속으로는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작동하고 있다.

지난달 발간된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 회고록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2018년 폼페이오 전 장관을 만났을 당시 “중국공산당은 한반도를 티베트나 신장처럼 다룰 수 있으려면 미군 철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며 자신을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신냉전’ 외치는 김정은

북한은 미·중, 미·러 패권 경쟁이 강화되는 현 국제 정세를 신냉전 체제로 인식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올해 1월1일 공개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체계로 명백히 전환되고 다극화의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이러한 판단은 더욱 강화된 모습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2월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2월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반면 전문가들은 북한 주장과 같은 신냉전 체제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지금의 대치 구도는 과거 미국과 소련의 냉전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며 “이념보다는 패권 논리가 지배적이고 각 국가가 양쪽으로 진영화되기 보다는 국익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이 차이”라고 설명했다.

신냉전을 기대하는 김 위원장 심리에는 정치·군사적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한반도 주변의 ‘북·중·러 대 한·미·일’ 대치 구도에 편승해 핵무력 고도화의 정당성을 만들려 한다는 평가가 많다. 박 교수는 “북한은 신냉전이라는 희망 사항을 내세워 핵 개발에 필요한 여건 조성 등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시할 수 없는 전쟁 부담

우크라이나 전쟁이 북한에 호재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러시아에 반대하는 세계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 등 가치를 매개로 정치·군사적 결속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지난 1월1일 “미국은 일본, 남조선과의 3각 공조 실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동맹 강화’의 간판 밑에 ‘아시아판 나토’와 같은 새로운 군사쁠럭(블록)을 형성하는데 골몰하고 있다”고 경계한 것이 대표적이다. 현 연구위원은 “미국이 대서양 동맹과 인도·태평양 동맹의 통합력을 높이겠다고 하는 건 북한에 엄청난 부담”이라며 “한·미를 상대하기도 힘든데 일본 등 더 많은 미국 동맹국들이 연합하면 어려운 환경이 된다”고 말했다.

한국과 미국이 지난 19일 한반도 상공에서 북한의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대응해 미국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을 동원한 연합공중훈련을 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 제공

한국과 미국이 지난 19일 한반도 상공에서 북한의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대응해 미국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을 동원한 연합공중훈련을 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 제공

북한이 러시아를 지지하면서도 러시아와의 무기거래설에는 적극적으로 선을 긋는 것도 전쟁에 대한 부담을 나타낸다. 북한 당국은 지난해 9월부터 다섯 차례 입장을 내 미국 당국발 ‘북·러 무기거래설’을 사실무근이라고 비판했다. 홍 실장은 “북한이 전쟁 국가를 지원한다는 오명으로 각종 제재가 가중될 가능성을 고려했을 수 있다”며 “향후 미국과의 협상 등 관계 개선을 고려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정도로 러시아와 유착을 보이는 것은 북한에 굉장히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이 바라는 전쟁 결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는 북한이 바라는 최상의 결과다. 박 교수는 “러시아가 승리해 기존의 국제 질서를 훼손하는 것이 북한 입장에서는 훨씬 유리하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은 새로 러시아로 편입된 지역의 재건에 참여하는 등의 반대급부를 고려해 전쟁이 러시아에 유리하게 끝나기를 바랄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지속을 원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현 연구위원은 “장기화 국면으로 들어가면 러시아는 북한을 더 필요로 할 것”이라며 “그때는 러시아가 대놓고 북한에 식량과 물자를 제공해 (무기 등과) 맞거래하려고 할 것이기에 북한은 손해볼 게 없다”고 말했다. 반면 전쟁 장기화는 북한에도 부담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홍 실장은 “전쟁 장기화는 러시아의 국력 쇠퇴와 미국의 패권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북한은 미국과의 대항 전선에서 러시아의 입지와 위상이 너무 약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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