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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포지션의 시대
USA투데이는 크리스 브라이언트와 크리스 테일러를 두고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이타적 선수’라고 적었다.크리스 브라이언트는 리그 전체가 주목하는 유망주 스타였다. 시카고 컵스에 1라운드 지명됐고, 2015년 데뷔하자마자 신인왕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내셔널리그 MVP를 차지했다. 시카고 컵스의 108년 된 ‘염소의 저주’를 끊는 우승 확정 때 3루수로 땅볼을 잡아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장식했다. 리그를 대표하는 3루수로 성장이 기대됐지만 브라이언트는 엄밀히 따지면 ‘3루수’가 아니다. 메이저리그 7시즌을 뛰는 동안 3루수로 678경기, 외야수로 265경기에 나섰다. 1루수로 32경기를 출전했고, 잠깐이지만 유격수로도 2경기를 뛰었다. 브라이언트는 “야구 코치 아들의 운명”이라며 웃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팀에서 뛰면서 필요할 때마다 모든 포지션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트는 “꼭 3루수일 필요도, 3번타자일 필요도 없다. 야구선수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 -
강백호, 천재의 진화
다른 구단의 베테랑 외야수가 물었다.“쟤는 학교 다닐 때 120~130㎞짜리 투수 나오면 그냥 서 있다 들어갔대요. 140㎞ 정도 던지는 투수 나와야 제대로 타격 자세 잡았대요.”다분히 과장된 이야기지만, 천재들에게는 이런 ‘설화’ 하나쯤은 생기기 마련이다. 온몸을 집어 던지는 듯한 강한 회전의 타격 폼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한 결과물이다.첫 홈런은 헥터 노에시로부터 뽑아냈다. 바깥쪽 낮은 147㎞를 강하게 찍어서 밀어 넘겼다. 다른 팀으로부터 ‘약점’이라고 분석됐던 코스의 공을 때려 첫 홈런을 만들었다. 2번째 홈런은 좌타자에게 어렵다는 우완 사이드암스로의 체인지업을 때려 넘겼고 3호 홈런은 조쉬 린드블럼의 몸쪽 꽉 찬 속구를 받아 넘겼다. 장원준의 몸쪽 제구된 슬라이더를 때려 넘긴 4호 홈런은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 홈런을 좌익수 자리에서 지켜본 김재환은 “우리 팀이 홈런을 맞는 상황인데도 ‘우와’ 소리만 내고 있었다”고 말했다.... -
눕방과 스토브리그
프로야구는 지난 11월18일 한국시리즈 4차전으로 끝났다. 고(故) 토미 라소다 감독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아도 야구가 끝난 날은 슬픈 날이다. 시즌 내내 소란과 소동과 사건이 많았다. 실수와 잘못, 회피와 외면 등이 이리저리 뒤섞였다. 그나마 시즌 막판 야구장에 팬들이 들어오며 작은 희망이 싹텄다. 팬들은 아직 야구를 버리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야구가 끝난 뒤, 조용해졌다. FA 최재훈이 계약했고, 미란다(두산)가 MVP에 올랐고 이의리(KIA)가 신인왕에 뽑혔는데, 야구는 조용했다. KIA 새 단장과 감독이 선임됐는데, 야구는 여전히 조용하다. 메이저리그까지 직장폐쇄에 들어가면서 야구의 공간은 소리가 없는 ‘무향실’에 가까워졌다.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음향연구소인 오필드 연구소의 무향실은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다. 콘크리트와 강철로 벽을 만들고, 유리섬유 흡음재로 안을 감쌌다. 모든 소리는 벽으로 흡수된다. 침묵과 고요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 -
FA의 경제학
FA 시장이 열리자마자 한화가 FA 포수 최재훈과 5년 최대 54억원에 계약했다. 옵션 최대 5억원을 제외한 보장금액은 5년 49억원이다. 연 평균 10억원이 조금 안 되는 금액이다. 역대 포수 중에서는 5위 계약이다. 최재훈의 FA 계약을 두고 ‘적정 가격’ 논란이 또 벌어지는 중이다. 54억원이라는 금액 자체가 ‘오버 페이’의 근거다. 지난해 오재일이 삼성과 4년 50억원에, 최주환이 SK와 4년 42억원에 계약했다. 허경민이 원소속 구단과 4년 65억원, 7년 최대 85억원에 계약했고 정수빈은 6년 56억원이었다. 최재훈의 계약 총액은 지난해 굵직한 FA들 못지않은 금액이다.‘적정 가격’이라는 주장에도 근거가 있다. 최재훈은 리그에서 프레이밍이 가장 뛰어난 포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팀 실점 억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앞선 시즌들 공격력이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2021시즌 타율 0.301, 출루율 0.405는 포수로서 나쁘지 않은 ... -
우리아스와 고영표, 묘수를 위한 조건
LA다저스가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NLDS) 4차전에서 샌프란시스코를 7-2로 이긴 10월12일 밤(현지시간)이었다. 코칭스태프가 모여 5차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리그 최다인 107승을 거둔 만만치 않은 팀이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야 했다. 알렉스 슬레이터 운영팀장이 입을 열었다.“혹시, 오프너 전략은 어떨까요.”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답했다. “그거, 흥미로운데….”5차전 선발은 이번 시즌 20승을 거둔 훌리오 우리아스였다. 20승 투수를 뒤로 빼는 것은 ‘변칙’이었다. 다저스 코칭스태프와 데이터팀이 머리를 맞댔다. 샌프란시스코의 장점인 ‘타선 다양성’을 흔들 수 있는 계획이라는 데 뜻을 모았다. 4번타자 버스터 포지를 한 번이라도 덜 만나는 게 낫다는 계산이 더해졌다. 포지는 2차전에서 우리아스를 상대로 2루타를 때렸다. 오프너 전략에 변칙을 하나 더해 ‘더블 오프너’ 전략을 세웠다. 우완인 코리 크네블이... -
회복탄력성
야구는 인지 편향으로 둘러싸인 종목이다. 앞 타석의 안타가 이번 타석의 안타를 기대하게 만들고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보장하는 듯 여겨진다. 반대로 앞 타석의 부진은 다음 타석의 불안으로 여겨지기 일쑤다. 최신 편향(recency)은 야구와 뗄 수 없는 요소다. 인지 부조화도 자주 일어난다. 우리 팀에 유리한 요소는 크게 보이고, 불리한 요소는 작게 보인다. 승리에 대한 바람과 열망이 합쳐져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어제 지고 난 뒤 세상을 잃은 것 같지만, 오늘 이기면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을야구는 ‘일희일비’의 세계다. 물론, 이게 야구의 매력이다.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7월 초 로널드 아쿠냐 주니어가 시즌 아웃 부상을 당하면서 ‘절망’에 빠졌다. 이미 투수 유망주 마이크 소로카는 또다시 아킬레스 건을 다쳐 뛸 수 없었고, 외야수 마르셀 오수나는 가정 폭력 혐의에 따른 징계로 시즌이 끝났다. 승률 5할에 닿을 듯 말 듯 하면서 시간이 계속 흘... -
가을야구는 드라이버만으로는 안 된다
“우리 타자들이 골프백 안의 다른 클럽들을 쓰기 시작했다.”골프 얘기인데, 야구 얘기다. LA 다저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10일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NLDS) 2차전을 이긴 뒤 이렇게 말했다. 골프도, 야구도 긴 채를 들고 스윙을 한다. 한쪽은 클럽이고, 다른 한쪽은 배트(방망이). 한쪽은 서 있는 공을, 다른 한쪽은 150㎞가 넘는 공을 때린다. 닮은 구석이 많다.다저스는 올 시즌 106승(승률 0.654)을 거두고도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9년 연속 우승에 실패했다. 지구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107승(0.660)을 거뒀기 때문이다. 리그에서 2번째로 많이 이기고도 90승을 거둔 세인트루이스와 와일드카드 시리즈 단판 승부를 펼쳐야 했다. 1-1로 맞선 9회말 크리스 테일러의 끝내기 투런 홈런으로 이겼다.샌프란시스코와 다저스는 ‘철천지 원수’에 가까운 라이벌이다. 죽어도 지면 안 되는 상대가 챔피언십시리즈(7전4승제)도 아니고 디비전시리즈(5... -
꿈의 구장 옥수수에 스티커가 붙은 이유
메이저리그는 지난 8월13일 아이오와주의 옥수수밭에서 특별한 경기를 치렀다. 1989년 개봉한 야구 영화 <꿈의 구장>을 현실로 만들었다. 옥수수밭에 야구장을 지었고, 뉴욕 양키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진짜로 경기를 펼쳤다. 경기 전, 영화 주연을 맡았던 케빈 코스트너가 마운드에서 선수들을 불렀다. 경기도 영화처럼 끝났다. 화이트삭스 팀 앤더슨은 7-8로 뒤진 9회말 끝내기 투런 홈런을 때렸다.아름다운 마무리였지만 문제가 벌어졌다. ‘꿈의 구장’에서 나온 꿈 같은 끝내기 홈런 공이 사라졌다. 옥수수가 너무 빽빽했다. 중계 화면을 통해 공이 사라진 근처를 뒤져 공을 찾더라도, 그 공이 경기 전 타격 훈련 때 날린 공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메이저리그는 홈런 공을 찾는 대신, 홈런 공이 사라진 근처의 ‘옥수수’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몇 줄기의 옥수숫대를 잘라서 ‘꿈의 구장 경기 끝내기 홈런 근처의 옥수수’라고 명명했다. 이제 이 옥수수는 보통의 옥수수랑 다르다.... -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이를테면 ‘한선태 룰’이라 할 만하다.KBO리그는 드래프트 참가 대상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에 6년간 등록된 선수로 제한하고 있었다. ‘엘리트’라 불리는 전문 선수로 6년 이상 뛰어야 신인 지명 대상이 된다는 규약이었다. ‘동호인 선수’ 한선태(LG)가 국가인권위원회를 두드린 끝에 2018년 규약이 개정됐다. 해외에서 학교를 다닌 김기태 전 감독의 아들 김건형이 KT에 지명될 수 있었던 것은 ‘한선태 룰’ 덕분이었다.KBO리그는 아예 드래프트 전체를 ‘신청제’로 바꿨다. 과거에는 KBSA에 등록된 선수 중 고교 및 대학 졸업자들이 자동으로 드래프트 대상자가 되는 방식이었다. 드래프트 신청제가 도입되면서 4년제 대학 선수가 2학년을 마친 뒤 드래프트에 나서는 ‘얼리 드래프트’가 가능해졌다. 최근 수년간 선수들에게는 4년제 대학보다 2년 뒤 다시 한번 프로 지명에 도전할 수 있는 2년제 대학의 인기가 훨씬 높았다. 현재 대학 최강팀은 2년제인 강릉 ... -
마이너리그, 1000번의 백신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샌디에이고)는 ‘천재’다. 공수주에서 모두 최상급 활약을 펼친다. 빅리그 데뷔 첫해인 2019년 신인왕 3위에, 2020년에는 내셔널리그 MVP 투표 4위에 올랐다. 올시즌 고질적 어깨 부상 때문에 몇 차례 부상자 명단을 오르내렸음에도 36홈런으로 내셔널리그 홈런 선두를 달린다. 도루 24개를 기록해 30-30이 가능하다. 주 포지션은 유격수인데, 어깨 부상 방지를 위해 8월16일부터는 외야수로 나선다. 시즌 중 포지션 변경인데도 외야수 적응이 순조롭다. 아직 실책은 없다. 아무데나 갖다 놔도 야구를 잘한다.분명 ‘천재’지만, 수련 과정이 필요했다. 2016시즌부터 2019시즌 초반까지 마이너리그에서 276경기, 1213타석에 들어섰다. 아무리 천재라도 마이너리그 1000타석을 소화해야 제 실력을 내는 게(혹은 낼 수 있다고 믿는 게) 야구라는 종목의 특징이다. 미국프로농구(NBA), 프로풋볼(NFL)과 다르다. NBA는 1라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