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kyo 2020

아빠처럼 날아 ‘별’이 됐어요

이용균 기자

여서정, 도마에서 동…한국 여자체조 사상 첫 올림픽 메달
1996년 애틀랜타서 은메달 딴 아버지 여홍철은 경기 해설

여서정이 1일 일본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기계체조 여자 도마 결선에서 힘차게 뛰어올라 혼신의 공중연기를 하고 있다.      도쿄 | 연합뉴스

여서정이 1일 일본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기계체조 여자 도마 결선에서 힘차게 뛰어올라 혼신의 공중연기를 하고 있다. 도쿄 | 연합뉴스

25년 전, ‘여’가 출발대에 섰다. 짧게 깎은 군인 머리에 긴장한 표정으로 로진이 잔뜩 묻은 손에 침을 뱉었다.

25년 뒤 또 다른 ‘여’가 출발대에 섰다.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살짝 웃은 다음, 매서운 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1996년의 ‘여’와 2021년의 ‘여’가 겹치는, 25년의 시간을 넘는 데자뷔.

기계체조 도마는 올림픽 종목 중 가장 짧은 순간 겨루는 종목이다. 도움닫기 포함 4초 안에 끝나는 승부다. 기회는 2번뿐. 8초가 채 안 되는 시간으로 메달이 갈린다. 그 8초를 위해 ‘여 이대(二代)’는 수년 동안 뛰고, 또 뛰고 날아올랐다. 어머니 김채은씨도 아시안게임 체조 메달리스트. 부모는 베란다에 평균대를 놓았다. 여서정은 “어릴 때부터 가만히 있는 걸 못했다”고 했다.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때 여홍철은 세계 최고였다. 그때 기술 ‘여2’는 앞 짚고 뛰어 두 바퀴 반을 비튼다. 여서정도 고유기술 ‘여서정’을 가졌다. 아버지보다 반 바퀴 덜 비틀어 내린다. 여홍철은 뒤로 돌아 착지, 여서정은 앞을 보고 착지다.

여서정(19·수원시청)은 1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체조 여자 도마 결선에서 아껴뒀던 기술 ‘여서정’을 준비했다. 스타트 점수(난도) 6.2로 결선 8명 중 가장 높다. 그러나 올림픽 결선의 부담감을 아버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여홍철은 대회 내내 긴장한 딸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 위로했다. 여서정은 “요 며칠 동안 아빠랑 카톡을 진짜 많이 했다. 힘이 됐다”고 말했다.

25년 전, 힘껏 날아오른 여홍철은 착지 순간 뒤로 크게 밀렸다. 메달 색깔이 바뀌는 걸 직감한 여홍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서정은 3년 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아버지가 못 딴 (올림픽) 금메달 따서 꼭 목에 걸어드리고 싶다”며 울먹였다.

과거 경향신문에 소개된 아버지 여홍철과 하연(오른쪽), 서정 자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과거 경향신문에 소개된 아버지 여홍철과 하연(오른쪽), 서정 자매.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서정이 입을 꽉 다문 채 달리기 시작했다. 1차 시기 ‘여서정’이었다. 힘차게 구른 뒤 앞 짚고, 25년 전 아버지처럼, 몸을 띄워올렸다. 손을 모아 비튼 뒤 두 발로 내렸다. 25년 전 그때와 달리 여서정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전광판에 15.333점이 떴다. 마이크 앞에 선 아버지는 “아아아 서정아, 너무 잘했어요. 착지도 너무 완벽했어요”라고 외쳤다.

2차 시기에서 난도 5.4짜리 기술을 안정적으로 펼쳤고, 착지에서 외발로 두 걸음 물러섰지만 여서정은 연기를 마친 뒤 기쁜 표정으로 이정식 코치에게 달려가 안겼다. 여서정은 2차 시기 14.133점을 받아 합계 14.733점을 기록했다.

3년 전 아빠의 목에 걸겠다고 한 ‘금’은 아니지만 레베카 안드라지(15.083점·브라질), 미카일라 스키너(14.916점·미국)에 이어 한국 여자 체조 올림픽 사상 첫 메달리스트가 됐다. 아버지는 “아아아 동메달, 하하하하. 네, 잘했습니다”라고, 목놓아 외쳤다. 자신의 은메달 때 실망했던 아버지는 딸의 동메달에 목이 메었다.

이로써 한국은 전날 펜싱 여자 사브르 단제천 동메달에 이어 여서정이 또 하나의 동메달을 보태며 대회 9일째인 1일까지 금메달 5개, 은메달 4개, 동메달 8개를 획득했다. 한편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는 우상혁(25·국군체육부대)이 2m35를 넘어 4위에 올라 종전 한국 기록(2m34)을 갈아치우고 한국 육상의 역대 올림픽 최고 성적(종전 8위)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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