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림’과 어떤 신세대

박해천 | 디자인 연구자

<퍼시픽 림>을 보았다. 동네 멀티플렉스로 향하기 전, 미지의 영화와의 운명적인 만남 같은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외려 본방 사수를 외치는 드라마 팬의 마음에 가까웠다고 할까? 멕시코 출신의 1964년생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이 영화의 제작에 참조한 일본 거대로봇 애니메이션들 때문이었다. 내가 속한 세대가 텔레비전을 통해 열광하고 프라모델로 직접 조립해보았던 그 로봇들의 세계가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으로 부활한다니, 30년의 시차를 두고 후속 방영분을 보러 가는 기분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개운치 못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야말로 1970년대 초중반생들에게 마지막 남은 판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이 세대가 로봇물에 빠져들었던 시점으로 시선을 돌려보도록 하자. 이들의 성장기는 적어도 네 가지 측면에서 이전 세대와는 뚜렷하게 구분됐다.

[문화와 삶]‘퍼시픽 림’과 어떤 신세대

첫째, 이들의 부모 상당수는 1970~8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의 급물살을 타고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 이들이었다.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 덕분에 이들의 형제는 한두 명 정도였지만 또래의 인구는 제2차 베이비붐 세대답게 100만 명을 넘나들었다. 둘째, 전두환 정권의 과외 전면 금지 정책 시행 덕분에 대다수의 아이들은 방과후 오후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셋째, 부모 세대의 경제력 증대, 기록적인 출생 인구수, 과외 금지로 남아도는 시간이 맞물린 결과, 이들은 유소년기부터 대중문화의 새로운 소비자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소년 잡지들이 속속 등장했고, 레고나 플레이모빌, 프라모델, RC 머신 등의 장난감들이 유행했다.

넷째, 컬러텔레비전은 이 아이들이 대중문화와 조우하는 데 친절한 조언자 역할을 해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접한 대중문화의 상당 부분이 ‘메이드 인 재팬’이었다는 점이다. 군사 정권의 수입 금지 조치와 검열 장벽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공중파를 탈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 아이들은 일본 현지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마징가 Z>와 <그레이트 마징가>, <은하철도 999>와 <미래소년 코난> 등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고도 성장기에 태어나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던 도시의 아이들, 그리하여 90년대에는 ‘신세대’나 ‘X세대’ 같은 이름으로 호명됐던 새로운 감수성의 소유자들이 30대의 나이에 접어들자 저출산 시대의 개막을 선도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이들이 IMF 외환위기를 거쳐 당도한 21세기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람이나 다름없었던 중산층의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초중반 자산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했거나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아파트 가격의 폭등세로 인해 내 집 마련은 요원한 일이었다. 행여나 은행에 손을 벌렸다면 하우스푸어가 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이들 상당수가 아이를 하나만 낳거나 아예 부모가 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문제는 이런 개별적 선택이 누적되다 보니 저출산이 대세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다시 <퍼시픽 림>으로 되돌아 가보자. 이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장기에 일본 대중문화의 수용에 첫 테이프를 끊었던 자신들이 마흔의 고비를 넘어서며 이제는 장기 경기침체라는 1990년대의 일본을 한국적인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플라즈마 캐논’이나 ‘체인 스워드’ 같은 집시 데인저의 필살기에 전율하는 자신을 발견한 다음 비록 몸은 젊음을 잃었지만 마음만큼은 아직 ‘꼰대’가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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