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증명하라는 부당한 요구, 당신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인증’ 권하는 사회에서 인증·리액션하지 않을 자유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최근 박지성 JS재단 이사장(전 축구국가대표 선수)이 악성 댓글을 남긴 누리꾼들을 경찰에 고소했다. 영국에 거주하면서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의 빈소에 조문을 가지 못한 것, 조의를 표현하지 않은 것을 두고 무분별한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박지성의 아내인 김민지 전 아나운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만두랑’도 공격당했다. 김민지 전 아나운서는 유튜브 채널에 글을 올려 부당한 비난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슬픔을 증명하라고요? 조의를 기사로 내서 인증하라고요? 조화의 인증샷을 찍으라고요? 도대체 어떤 세상에 살고 계신 겁니까.” “본질적으로 남편이 어떤 활동을 하든 혹은 하지 않든 법적·도의적·윤리적 문제가 없는 개인의 영역을 누군지도 모르는 그분들에게 보고해야 할 이유가 저에게나 남편에게 도무지 없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찍어 올린 ‘눈물 셀카’는 한때 ‘오글거린다’ ‘셀카를 찍을 여유가 있다니 덜 슬픈 거다’라는 이유로 웃음거리였다. 이제는 ‘정서적 눈물 셀카’, 내가 얼마나 슬픈지 인증 가능한 게시물을 올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의 감정이나 발언,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 없는 것, 혹은 ‘주작’이 된다. 주작은 ‘없는 사실을 꾸며 만듦’이라는 뜻의 표준어인데, 원래 거의 쓰이지 않다가 인터넷상에서 ‘조작’의 대체어로 활용되었다. 슬픔을 ‘증명’하라는 요구. 그리고 그 증명이 없으면 어떤 감정이나 표현, 사실을 ‘없다’고 여기는 감각. 자신이 타인에게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보고받을’ 의무가 있다고 착각하는 태도. 박지성의 ‘조의 사건’과, 김민지 전 아나운서의 글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증 문화’에서 파생된 다양한 문제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 1920년대, 일제 치하 지식인이 술 권하는 사회에 살았다면 2020년대, 현대인은 ‘인증 권하는 사회’에 산다.

배경부터 살펴보자.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개인마다 카메라를 항시 소지하게 되었다. 이제 특정한 날, 특정한 이벤트뿐 아니라 일상의 매 순간을 이미지로 기록하고 저장한다. SNS는 이미지를 앨범 속 비닐에서 꺼내, 전시와 공유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자신의 경험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SNS에 업로드하는 현상은 ‘인증’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기사를 읽는 지금, 당장 고개를 길게 빼서(거북목 주의! 거북목 주의!) 주변을 둘러보자. 음식이든, 친구와의 만남이든, 아름다운 하늘이든, 흥미로운 장면이든, ‘인증샷’을 올리려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당신이 기사를 캡처하거나 찍어서 올릴 수도 있겠다. ‘인증’과 촬영을 뜻하는 ‘샷(Shot)’의 합성어인 ‘인증샷’은 현대인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인증 행위는 자신을 위한 기록장치인 동시에 타인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핫플(레이스)’ 방문 인증, 투표 인증, 후원 인증, 구매 인증, 여행 인증, 성과 인증…. 일상의 모든 순간이 콘텐츠가 되고, ‘스토리’와 ‘라이브’ 기능을 통해 삶은 생중계된다. 우리는 내가 오늘 뭘 먹었는지, 어디를 갔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일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누구와 친한지 낱낱이 보고한다. 칸트가 동시대를 살았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인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평생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했다는 칸트도 #미라클모닝 해시태그를 달고 기상 시간을 인증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SNS 에 일상을 전시·공유하면서
현대인의 구성 요소가 된 ‘인증샷’
자아를 연출·과시하려는 욕망이
진정성과 만날 때 문제가 생긴다

타인의 고통을 멋대로 검증하고
그렇지 않을 때 인정 못하는 태도
이건 대단한 정의 구현도 아니고
통제 욕구 품은 공격성일 뿐이다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연출하고, 정보를 편집하여 타인에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증 문화가 ‘진정성’과 결합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인증하는 것을 넘어 그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댄다. 인증 없는 정보는 즉각 진정성을 의심받고, 증명하라는 압박이 사방에서 들어온다. 몇 년 전, 트위터에는 어릴 때부터 불치병으로 투병하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며 그동안 제한당했던 음식을 마음껏 먹어보고 싶다는 계정이 등장했다. 병원식 외의 음식 경험이 거의 없으니 맛있는 것을 알려달라고 요청하고, 오늘은 무엇을 먹어보았다면서 즐거워하는 계정주에게 많은 사람이 응원과 지지를 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계정에 ‘네가 시한부라는 증거가 있느냐, ‘병명이나 진단서를 인증하라’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으니 질투가 났던 모양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검증’하게 하고, 그러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는 엄중함에는 헤아리기 힘든 끔찍함이 있다. 계정주는 괴롭힘을 받다가 안타깝게도 계정 운영을 중단했다. 맛있는 것을 추천받고 감상을 쓰는 일이 설령 주작이라고 한들, 이를 밝혀내는 것이 무슨 대단한 정의 구현이지?

인증 요구는 결국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만 타인을 인정하겠다는 통제 욕구의 발현이다. 내가 ‘봐야만’ 그렇다고 믿고, 볼 수 없는 곳에서 존재하는 타인은 삭제하고, 나의 상식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은 상대가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명 논란도 비슷한 맥락이다. SNS에는 수많은 정보의 파편이 둥둥 떠다닌다. 그중에는 한 명의 것이지만 상충하는 정보도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견이나 지향성이 변화하기도 하고(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인간은 원래 입체적이니 모순되는 면이 공존하기도 한다. 무단횡단을 하면서도 쓰레기를 줍는 게 인간이라고들 하니까. 그런데 특정 정보나 발언이 현재와 다를 때,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한다. 사실 해명 자체보다는 ‘지금의 너’가 진짜가 아니라고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더 뾰족하게 두드러질 때가 많다.

디아 작가는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웨일북, 2019)에서 현대인은 ‘리-액션’을 하면서 산다고 성찰했다. 리액션은 타인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어떤 사안에 의견과 생각을 표시하거나, 댓글을 달며 소통하는 모든 소셜 네트워크 행위를 일컫는다. “현대인은 하루 종일 ‘리-액션’이라는 것을 하면서 산다. 리액션은 타인의 욕망에 응하는 행위다. 디지털 기계들에 둘러싸여 있어 꼼짝도 할 수 없다. 기계 자체는 훌륭하지만 이 훌륭한 기계들로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리-액션하는 데 골몰하고 만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요구하는 길을 하게 한다, 더 많이 하게 한다, 언제든 하게 한다’의 끝은 어디일까. 어쩌면 디지털 모바일 사회가 아닐까. 리-액션에 몰두하면 내 욕망은 계속 거부된다. 자기 욕망을 무시해야 버틸 수 있다. 리-액션 전문가들은 자기 시간이 없다. 까다로운 손님들이 가득한 가게의 주인과 같다. (…) 내 시간은 이미 타인의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리액션을 하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내 시간은 타인의 욕망으로 채워진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리액션을 요구할 때 타인의 욕망과 시간을 침해한다. 알고자 하는 욕구와 나의 이해를 우선한다. 이것이 증명이 폭력으로 작동하는 원리다.

나 역시 특정한 날, 특정 해시태그를 달지 않았다는 이유로 메시지를 받은 적 있다. “페미니스트라면서 왜 침묵하세요?” 답장하지 않자 한 통 더 왔다. “무시하는 거 보니 찔리나 봐요?” 인터넷에 올리지 않았다고 해서 나의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며, 당신은 메시지를 보낼 자유가 있으나 나는 답장할 의무가 없다고 설명하려다 그만뒀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존재할 때까지 인증을 요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드래곤이 부릅니다~. “니가 뭔데.”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다(정체성 서사의 최종 편집권은 당사자에게 있다).” 내가 ‘인정하겠다’라고 ‘인정’한 객관적 지표보다, 당사자가 그 스스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나에게 보이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거나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원래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내게 알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박지성이 얼마나 슬펐는지, 어떤 방식으로 조의를 표했는지, 가까운 사람은 알겠으나 ‘누군지도 모르는 그분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 SNS가 그 당연함을 뒤틀어 놓았을 뿐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해명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타인에게 증명과 해명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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