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유튜브에 한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쿠팡플레이에서 9월부터 방영을 시작한 <SNL리부트> 중 한 꽁트 영상이었습니다. 이 영상은 올라온지 불과 3일만에 조회수 100만을 훌쩍 넘길 정도로 이목을 끌었는데요. 배우 주현영의 ‘신들린 연기’를 찬양하거나, 이 코미디가 20대 여성을 비하한 올바르지 않은 코미디라는 지적 등을 담은 기사들도 나왔습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 코미디가 맞는 코미디인지, 틀린 코미디인지”가 아닙니다. 어떤 질문은 제기되는 순간 이야기를 고정된 틀에 넣어버리게 됩니다.
저는 “이 코미디가 올바른 코미디냐?”란 질문 자체를 신중하게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오늘 글을 준비했습니다. 명확한 답을 드릴 순 없겠지만 한번쯤 함께 읽고 고민해보고 싶은 이야기들을 가져와봤습니다.
■지옥에서 온 코미디언들 : 스탠드업
“히틀러와 폴포트는, 둘다 세계 최악의 악당이지만 동물 실험 없이도 굉장히 많은 의학 연구를 해냈죠.(*)“
“오늘 밤 캘리포니아로 일찍 출발해야 되는데, 직항편이 아니라네요. 비행기가 먼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들러야 한다고 하더군요.”
(*)폴포트는 캄보디아의 독재자로 히틀러와 폴포트 모두 인체 실험을 했다는 것을 비꼰 우스개
이 두 조크는 각각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지미 카, 길버트 고트프리드가 한 농담입니다. 특히 길버트 고트프리드는 이 농담을 9.11 사태가 벌어진 후 얼마 안되었을 때 했는데, 당시 관중들은 ‘너무 이르다!’며 소리를 지르고 야유했죠.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개그프로그램인 SNL마저도 사태의 처참함 때문에 약 3주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가 이젠 웃겨도 될까요?Can we be funny?”라고 조심스럽게 방송을 재개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의 조크는 미국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줬습니다.
영국 스탠드업 코미디언 지미 카는 민감한 주제로 능란하게 블랙조크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의 쇼를 보면서 인종차별 소재 유머로도 웃기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죠.(할머니가 나한테 붉은 실로 스웨터를 짜줬어요. 앞판에는 ‘깜둥이들은 너네 나라로 꺼져!’라고 자수가 놓인걸로요. 그래서 전 못입겠다고 소리쳤죠. ‘이건 빨간색이잖아요!’)
이 밖에도 우리의 시각에선 ‘충격적인’ 소재들이 스탠드업 코미디에선 자유롭게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아랍계 코미디언들이 주로 출현한 미국 다큐멘터리 <Make America Laugh Again>(2020)에는 자신의 아랍계 정체성을 테러리스트로 비하하고 비꼬는 코미디언들이 등장합니다. 미국 패럴림픽 축구선수 경력을 지닌 뇌성마비 장애인 코미디언 조시 블루는 장애 코미디가 전매 특허고요. 낙태, 자살폭탄테러, 장애, 미국 노예제도 역사 등 첨예한 소재는 한도끝도 없습니다.
마이크 하나와 연기자 한명이 전부인 스탠드업 코미디는 코미디언 각자의 개성을 바탕으로 한 거침없는 입담이 핵심입니다.“스탠드업 코미디의 모어는 English(영어)가 아닌 American(미국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스탠드업은 지극히 미국적인 장르인데요. 우리나라에서도 자니윤 등 미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한 사람들이 소수 있지만, 국내에선 검열 및 보수적 사회 분위기 등의 이유로 크게 유행하진 못했습니다.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은 표현의 자유를 가장 값진, 지켜야할 보물로 여깁니다. 2019년 미국 최고의 코미디언들에게 수여되는 마크 트웨인상 수상 소감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 데이브 샤펠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완전히 미국적인 장르죠. 이 나라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서 다뤄지지 않은 의견은 단 하나도 없을 겁니다 [...] 간혹 인종차별주의자인 코미디언들도 있는데, 전 무대에 오른 그들과 웃는 관객들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자식 꽤 진심인데?’ 그들에게 화내지도 말고 증오하지도 마세요. 때론 나는 그들과 맥주 한잔 하는데, 때론 그들의 인종차별적인 의견을 포장한 유머 기법 자체에 감탄하기도 하죠.
다들 그렇게 심각하게 굴지 말아요. 수정헌법 1조가 1조인 이유가 있는거죠. 수정헌법 2조는 1조가 안먹힐 때를 대비한 거고요.(*)”
-넷플릭스, <데이브 샤펠의 날: 마크 트웨인 유머상 수상 기념 스페셜> 중
(*수정헌법 1조=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막는 어떤 법 제정도 금지하는 법, 수정헌법 2조=총기 휴대의 권리)
■표현의 자유 vs 정치적 올바름
그런데 미국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와 달리 표현의 자유가 절대원칙처럼 여겨지는 왕국일까요?
당연히 미국 코미디 무대에서도 모든 개그가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계 코미디언 매거릿 초는 클럽에서 강간 소재로 코미디를 하다가 도중에 손님들이 모두 야유를 하며 중간에 공연장을 나가버려 쇼가 중단된 일이 있었습니다(이 일화는 넷플릭스 <사인펠드와 함께 커피 드라이브> 매거릿 초 편에서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유명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 캐시 그리핀은 2017년 트럼프 모양 고무가면을 손에 들고 그 위로 피를 연상하게 하는 빨간 물감을 부은 사진을 찍었다가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강제로 하차당하고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해당 사건 이후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담은 다큐멘터리(<Kathy Griffin: A Hell of a Story>,2019) 를 촬영하고 그 사건 마저도 다시 개그로 승화시켜 현재는 복귀에 성공했습니다. (공식 트레일러 링크)
최근 미국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은 굉장히 첨예한 이슈입니다. 최근 미국에선 표현의 자유에 대항하는 ‘캔슬 문화Cancel culture’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기도 한데요. 트럼프 집권기의 혐오 분위기, 조지 플로이드 사건 등으로 인해 인종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사람들이 코미디언들의 조크에 반대 의견을 내놓는 분위기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코미디언들은 공연 중 훼방꾼의 공격에 시달리거나 공연 자체가 취소되기도 하죠.
스탠드업 코미디의 세계에서 ‘통하는’ 조크와 ‘위험한’ 조크의 간극은 종이 한장차이입니다. 똑같은 조크인데도 어느 관객들에게는 싸늘한 반응이 돌아오고, 어느 관객들은 대폭소를 하죠. 아주 유명한 코미디언들조차도 항상 살얼음 딛는 마음으로 무대에 오릅니다.
개그가 코미디언 본인에 의해 ‘철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초기에 공주병 캐릭터로 유명했던 유태인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 사라 실버만은 “전 의사에게 강간당했어요. 유태인 소녀에겐 달콤씁쓸한 일이었죠”라는 조크로 유명했는데요. 그는 후에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 개그에 대해 후회하고 더이상 그 개그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여성과 유태인을 명백하게 희화화하는 개그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실버만이 후회하고 ‘착한’ 코미디언이 되었을까요? 천만에요. 그는 여전히 엽기적인 각종 ‘29금’ 개그들로 사람들을 빵빵 터지게 하고 있죠.
그들의 표현의 자유는 하늘에서 거저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탐구하고 실수하고도 수없이 도전한 결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선’을 지키라는거야? : 아우슈비츠 유머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 사이의 선은 어떻게하면 ‘잘 ’조절할 수 있을까요? 2016년 페르네 펄스타인 감독의 다큐멘터리 <마지막 웃음The Last Laugh>은 그 틈새를 탐구한 문제작입니다. (공식 트레일러 링크)
이 작품에서 감독은 ‘아우슈비츠 유머’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핵심 메시지는 두개입니다. 첫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조차 사람들은 웃었다. 둘째, 아우슈비츠를 유머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단, 아주 섬세한 방법으로.
처음 이 다큐멘터리를 접했을 때 왜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전히 같게 볼 수는 없겠지만, 사회의 금기성으로 봤을 땐 한국에서의 위안부 유머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비극에 대해선 애도만 하면 되지 왜 굳이 그것에 대해 웃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유는 우리가 웃음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 ‘웃는 인류’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웃음>에선 생존자들이 캠프 안에서 돌았던 각종 유머 등에 대한 이야기도 합니다. “우리는 웃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예요” “캠프 안에 마임을 하는 소녀가 있었어요. 웃길 거라곤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확실한 건 그 소녀가 마임을 할 때마다 내가 미소짓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죠” 수용소 안에선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장티푸스에 대한 유머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사소한 농담에도 크게 웃으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는 웃고 있어. 나는 아직 인간이야!’
아우슈비츠에 대해 웃는 것을 통해 우리 사회는 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공론의 무대 위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레니 브루스는 “깜둥이Nigger라는 단어를 계속 말하면 (그 단어에 내포된) 힘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이 밖에도 이 다큐멘터리에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영감을 주는 많은 문장들이 등장합니다. “불편하다는 것이 곧 틀렸다는 걸 뜻하지 않습니다. 그 불편함이 정확히 옳은 것일 수 있죠.” “금기가 늘어나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면 사회에 더 많은 터부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길버트 고트프리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극에 시간을 더하면 코미디라는 말이 있죠. 그렇다면 대체 우린 왜 기다리는거죠?”
이 작품에선 아우슈비츠, 나치와 관련된 코미디들을 수용소 생존자에게 보여줍니다. 생존자 할머니는 어떤 유머에선 희미하게 웃음을 띠지만, 어떤 유머에선 눈을 찡그리며 “이건 전혀 재밌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가스실 안의 수용소 희생자들을 ‘오븐에서 뛰쳐나오는 유태인’으로 묘사한 유머나, 생존자를 무조건 자기 말만 맞다며 주장하는 고집쟁이로 희화화한 유머엔 눈을 찌푸렸습니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인 유머는 사라 실버만의 홀로코스트 유머였는데요. 그는 홀로코스트 유머를 하면서도 희생자가 아닌,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극우파 정치인들을 희화화했습니다. 혹은 그냥 바보같이 웃기거나요(“틀에 박힌 아우슈비츠Auschwitz 박물관에 질리셨나요? 사라 실버만의 와우슈비츠Wowschwitz로 오세요!”)
삼풍백화점 참사 피해자를 조롱하거나 일베에서 세월호 피해자를 어묵으로 묘사하는 것이 코미디가 될 수 없듯, 표현의 자유는 반드시 잘 조절되어야 합니다. 데이브 샤펠은 표현의 자유와 선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협상(leverage)’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펄스타인 감독은 ‘선을 지키는 꿀팁’같은 것을 내놓진 않습니다. 대신 이 다큐멘터리에선 나치를 연기한 코미디언이나 아우슈비츠 농담을 연구한 많은 유태인 작가, 코미디언, 생존자 등에게 끈질기게 묻고 또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아우슈비츠에서 웃었습니까?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어떻게 농담할 수 있을까요? 한 인터뷰이는 말합니다.
“(선을 잘 지키는) 왕도같은 것은 없어요. 진심을 담아, 잘 하는 수밖에요.”
■맺음말
솔직히 말하면 처음 인턴 기자 코미디를 봤을 땐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의 불안한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에서 사회 초년생 수습 기자일 때의 제 모습을 봤기 때문이죠.
잘 만든 코미디는 현실의 반영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코미디를 보고 느낀 저의 불편함은 아마도 ‘사실 적시에 의한 불편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금지시킬 순 없는거죠.
누군가는 그 사실을 보고 권력자에 공감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약자에 이입하거나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그 코미디를 통해 세상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고, 거기에 대해 누구든 한마디씩 거드는 일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지 않는 한,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의견들이 물 위로 올라오고 타협점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웃음 덕분에 조금은 누그러진 분위기에서 말이죠.
시카고에서 데뷔한 일본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야나가와 사쿠의 꿈은 일본 최고의 무대 부도칸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 굳이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활동하려는 이유는 일본을 서로 다른 의견의 소통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사회로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최근 일본의 젊은이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 서로 웃지 않아요. 저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일본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NHK World 링크)
더 많은 민감한 이야기들을 ‘링 위’로 올리고, 더 많은 것에 대해 왁자지껄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려져 있는 한 해결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으니까요.
“예전에 저는 ‘사회 변화에 대해 반동적으로 나타나는 인종차별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알아낼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진보적 인종차별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저는 인종차별을 하라고 이야기한 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사람들 사이에 진실된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주는 약간의 역겨운(obscene) 발언들이 작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농담을 사용하고, 그로써 조금 더 우리가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 슬라보예 지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