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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링크) 12월 15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터에는 해당 주제에 대해 추가로 읽을만한 책과 글 소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의 글로 하나의 깊은 영감을 드리는 <인스피아>를 구독해 주세요. 혹시 링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괄호 안의 주소(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07426)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노키즈존 논란은 꾸준합니다. 2014년 처음 노키즈존이란 단어가 생긴 이후로 ‘노키즈존 식당과 카페’ 지도가 생겼고 등록된 가게들만해도 수백개에 달합니다. 현행법상 노키즈존 여부를 반드시 표시하지 않아도 되므로 실제론 이보다도 훨씬 더 많을 수 있겠죠. 심지어 최근엔 “개는 괜찮지만 애는 안된다”는 팻말을 내건 카페가 등장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스피아] 노키즈존 : 죽은 도시에서 아이 키우기

저는 예전부터 노키즈존 관련 논란을 볼 때마다 곰곰 생각했습니다.

아이는 정말로 민폐일까? 부모가 민폐일까? 아니, 그 이전에 민폐인 사람은 쫓아내면 그만인걸까? 그렇게 ‘민폐러’들을 지워내다보면 ‘남은 사람들’은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이번 레터에선 도시라는 장소, 그리고 그 안에서의 관계에 주목해온 학자들의 책(레이 올든버그 <제3의 장소>, 제인 제이콥스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 등)을 중심으로 노키즈존에 대해 해찰해보려 합니다.

■동네에서 배우는 아이들 : <제3의 장소>

여러분은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대해 어떤 추억이 있으신가요?

제 경우엔 어린시절 살던 동네의 작고 다정한 가게들로부터 추억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동네 철물점에서 장기를 두시는 할아버지 옆에서 뒹굴대다 간단한 심부름을 하고 군것질거리를 얻어먹고, 구멍가게 아주머니에겐 ‘어린이은행 돈’을 가져다가 과자를 사오기도 했습니다.(물론 나중에 어머니가 대신 ‘환전’을 하셨고, 저는 큰 꾸지람과 교훈을 얻었죠-“새콤달콤은 10원이 아니라 100원이야!”) 비디오가게 안 TV에 틀어져있는 후레쉬맨 최신작을 보고 싶어서 한참 밖에 서있으면 의자를 내어주시던 주인 아저씨도 기억이 납니다.

지금 떠올려보면 상당한 민폐쟁이였지만, 어린이들도 혼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동네의 어른들은 어린이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어렸을 적 동네 구멍가게 앞 평상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왼쪽). 오른쪽은 건축가 황두진이 <응답하라1988> 드라마를 보며 추정해 그린 덕선이네 동네 지도. 출처: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선비즈

어렸을 적 동네 구멍가게 앞 평상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왼쪽). 오른쪽은 건축가 황두진이 <응답하라1988> 드라마를 보며 추정해 그린 덕선이네 동네 지도. 출처: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선비즈

레이 올든버그는 책 <제3의 장소>에서 어린이들이 ‘어슬렁대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어른들과 함께 자유롭게 어울렸던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3의 장소’에 대해 짧게 소개하자면, 역사적으로 신분이나 나이에 상관 없이 사람들이 어울릴 수 있었던 펍이나 커피하우스 등의 중립적이면서도 따뜻한 장소입니다. 이곳엔 대체로 어린이들도 출입할 수 있었죠.

아이들은 가게의 ‘민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식당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20세기 초중반 리버파크의 아이들이 어떻게 가게에서 무일푼으로 죽치고 앉아 놀면서도 가게 주인, 손님과 어울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리버파크의 아이들은 메인 스트리트에서 때와 장소, 즉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디에서 놀아도 되는지를 금세 배웠다[...]토요일 오후 1시부터 5시 사이에 음식점에 가면 한구석 칸막이 좌석에서 포커 게임을 하는 여덟살짜리 아이들을 볼 수도 있었다. 판돈을 넣는 통에는 녹색과 검은색 크레용으로 테두리를 칠한 부동산 양도 증서나, 장난감 돈 수천달러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가게에선 양주잔에 크림소다나 펩시콜라를 따라주기도 했다. 칸막이가 없어도 상관 없었다. 아이들은 알아서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정직한 게임’을 위해 탁자 위에 장난감 권총을 놔두었지만 발사한 적은 없었다. 아이들은 손님이 없는 시간에도 그 장소가 살아있게 만들어 주는 존재였다. -레이 올든버그, <제3의장소>(이하 동일)

즉 리버파크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몰려다니고 관찰하고 어른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의 관습과 예절을 배웠습니다. 손님이 없는 시간엔 적당히 노닥거리다가, 손님이 많아지면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고 일손이 부족할 땐 가게일을 자진해서 돕기도 했죠. 아이들은 손님이 없을 때도 북적이고 항상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으므로 가게 주인들로서도 그닥 손해가 아니었다고 하네요.

술 마시는 어른과 아이들이 뒤섞여 있는 게 자연스러웠던 ‘폴라야 클럽’에서도 아이들은 점잖게 굴었습니다. 바텐더가 아이들에게도 어른과 똑같이 진지하게 대해줬기 때문이죠. 아이들은 바텐더 앞에서 자신이 마치 어른이 된 것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즉, 바텐더는 어린이를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취급해주었던 것이죠.

바텐더는 누구에게나,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친밀하게 말을 걸었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느껴졌다. 소년들은 그 앞에서 특히 행동을 조심했다. 동경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가 있으면 바텐더가 카운터 아래에서 패들볼을 꺼내 주면서 바깥에 나가서 놀라고 했다.

통상 아이들이 공공장소에서 항상 제멋대로 울부짖고 소란을 부린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어른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되면 스스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의젓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이 책에는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 한 동료의 이야기도 등장하는데요. 그는 어렸을 때 항상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네 드러그스토어에 가서 어른들의 대화를 두근대며 들었던 경험을 두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경험”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드러그스토어에서 아버지 옆에 앉아 어른들의 대화를 들으며 정치와 사회 문제를 배우고 일찌감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는 교과서나 동화책만으론 얻기 힘든 경험이었죠.

동네가 아이들 역시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주었기에 아이들은 어른처럼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연스럽게 예절과 삶을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죽은 도시에서 아이 키우기 :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최근 한 아파트에서 외부 아이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해 논란이 된 일이 있었죠. 이 밖에도 ‘외부인’들이 오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단지를 ‘높은 울타리’로 막는 아파트들이 많은데요. 과연 외부인들이 오지 않으면 안전한 아파트가 되는 것일까요? 아마 제인 제이콥스는 이런 풍경을 보면 고개를 저을 것 같습니다.

도시계획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은 ‘활력 넘치는’ 도시의 조건과 이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를 탐구한 책입니다.

그는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핵심 요소로 ‘사람’을 꼽는데요. 아무리 삐까뻔쩍하고 큰 고급아파트 단지라고 해도 정작 그 안에서 사람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다양한 관계가 그물망처럼 형성되지 않으면 ‘죽은’ 도시라고 말합니다.

‘외부인 놀이터 출입금지’ 현수막을 걸어놓은 한 아파트 놀이터의 풍경

‘외부인 놀이터 출입금지’ 현수막을 걸어놓은 한 아파트 놀이터의 풍경

왜 우리는 활력있는 도시를 만들어가야 하는 걸까요? 제이콥스는 활력 있는 도시의 가장 큰 효과로 자연스런 치안 효과를 꼽고 있습니다. 활력 넘치는 도시에선 하루 종일 사람들이 오가고, 거리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십명의 경찰관이 거리를 주시하는 효과를 낳죠.

누구도 ‘거리를 지켜보기 위해’ 고용되지 않았지만 활력있는 도시의 주민들은 항상 오지랖을 부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 책에선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가려다가 수십명의 주민들에게 순식간에 경계당한 한 남자의 사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아래에 조금 옮겨보겠습니다.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듯 했다. 그는 아이를 구워삶듯 관심을 보이다가 또 이내 짐짓 무관심한 척했다. 아이는, 애들이 저항할 때면 흔히 그러하듯이, 거리 맞은편 공동주택의 담벼락에 기댄 채 뻣뻣하게 서 있었다[...]거리 이쪽편에는 열쇠점 주인과 과일가게 남자, 세탁소 주인이 이미 가게 밖으로 나와 있었고, 우리 말고도 여러집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남자는 알지 못했지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여자애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이가 끌려가도록 내버려 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제인 제이콥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하 동일)

이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는 사실 그 남자가 아이의 아버지였다는(!) 어찌보면 허무한 결말로 끝납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실제 위험’들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거리의 아이는 친절하고 든든한 경찰관들에 매일 둘러싸여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반면 죽은 도시에선 아무리 시설과 감시 시스템이 훌륭해도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에선 고급 주택단지 놀이터에서 이상한 사람이 아이를 위협해도 그 곳에는 감시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누구도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리 동네 근처에 있는 상대적으로 우아한 놀이터를 지나면서 나는 엄마들과 관리인이 사라지고 없는 늦은 오후에 놀이터에는 스케이트로 꼬마 여자애를 후려치겠다고 을러대는 어린 남자애 둘과,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흔들어대면서 그러면 안된다고 중얼거리는 알코올중독자 한명뿐임을 눈치챘다.

결과적으로 ‘죽은’ 도시에선 수십명의 경찰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완벽하게 위험이 사라질 순 없는데, 투입할 수 있는 인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도시에선 ‘자신의 아이를 위해’ 부모 개인이 노력해도 살아있는 도시의 치안을 얻을 순 없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 중 인상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뉴욕의 한 고급 아파트에 이사온 한 여성은 자신의 여덟살 난 아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시간만 나면 모든 집과 공원 벤치들을 방문하며 동네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죠. 하지만 어느날 그녀의 아들은 아파트 엘레베이터에 갇혀 몇시간 동안 큰 소리로 소리치며 울었지만 아무도 아이를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동네 사람들에게 항의하지만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말했죠.

“아, 그 애가 당신 아들이었군요. 몰랐네요. 당신 아들인 줄 알았으면 구해줬을텐데요.”

결국 치안은 관계망안에서 나오는 것이며, 모든 아이가 안전해야 한 아이도 안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모두가 안전하지 않으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전염병 상황처럼요.

활력있는 도시에선 주민들이 단순한 감시를 넘어 아이를 교육시키는 적극적인 안전망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날 제인 제이콥스의 아들은 무단횡단을 하다가 길거리를 지켜보고 있던 열쇠점 주인에게 호되게 호통을 듣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아이는 나중에라도 굉장히 위험한 사고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실생활에서 아이들은 오로지 도시 보도의 평범한 어른들을 통해서만 성공적인 도시 생활의 기본 원리를 배운다[...]사람들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더라도 서로에 대한 공적 책임을 조금이라도 떠맡아야 한다. 이런 교훈은 말로 들어서 배우는 게 아니다. 당신의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아니거나 당신에 대해 공식적 책임이 없는 타인이 당신을 위해 조금이라도 공적 책임을 떠맡는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열쇠점 주인 레이시씨가 우리 아들이 찻길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호통을 치고 나중에 남편이 열쇠점을 지나칠 때 애가 무단횡단을 했다고 알려줄 때, 우리 아들은 안전과 질서 준수에 대한 명백한 교훈 이상을 얻는다.

제인 제이콥스는 이 책에서 감시, 교육 등을 각기 경찰, 부모의 ‘몫’으로 한정짓지 않습니다.

제이콥스는 한 거리를 죽이는 것은 경찰관 수십명을 없애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렇게 생겨난 ‘심연’은 어떤 최고의 서비스로도 메워질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사람은 취약하고, 빈틈이 있습니다. 누구나 당연히 (공중장소에서 필요한 에티켓을 완벽하게 가르치고 공중장소에선 로봇처럼 아이를 ON/OFF 모드로 전환 할 수 있는) ‘슈퍼 부모’나 범죄자를 모조리 예방, 잡아들이는 ‘슈퍼 경찰관’이 될 수 없고, 아이가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온 동네의 어른들이 필요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이에게만 좋은가?

이처럼 ‘아이에게 좋은 도시’는 과연 아이에게‘만’ 좋은 도시일까요? 당연히 그럴 리 없습니다. 일단 아이가 자유롭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거리는 당연히 어른에게도 좋겠지요.

앞서 소개했던 ‘제3의 장소’의 진짜 효용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제3의 장소로는 영국의 펍, 비엔나의 커피하우스, 미국의 태번이나 드러그스토어 등이 있었는데요. 이런 장소의 특징은 당연히 어린이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 환영받는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곳인지 감이 잘 안잡히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제3의 장소>를 읽으면서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을 떠올렸습니다. 성소수자, 야쿠자, 어린이, 여자 회사원, 배우 등이 한데 어울려 자연스럽게 말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요. 이곳은 ‘가족같은’ 분위기라기보다는그저 서로간의 거리를 존중하며 따뜻한 환대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장소이죠. 당신이 누구든 어울릴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의 장소입니다. 이런 장소에선 “1페니만 내면 누구나 학자가 될 수 있었”고, 나이 어린 사람과 노인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죠.

일본의 인기 드라마 <심야식당>에는 다양한 나이대, 직업,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온기를 나눕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손님은 다른 손님을 이웃으로서 환대합니다. ‘제3의 공간’은 계급이나 일상적 고민에서 벗어나 시민 대 시민으로서 교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는 가족이나 지인 등이 채워줄 수 없는 종류의 교류이죠.

일본의 인기 드라마 <심야식당>에는 다양한 나이대, 직업,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온기를 나눕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손님은 다른 손님을 이웃으로서 환대합니다. ‘제3의 공간’은 계급이나 일상적 고민에서 벗어나 시민 대 시민으로서 교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는 가족이나 지인 등이 채워줄 수 없는 종류의 교류이죠.

모두가 다른 일행에게 관심이 없는 냉랭한 장소라면, 아이가 소란스럽게 할 때 문제는 모두 부모의 몫이죠. 실제로 현재 부모들은 어디든 맘 편히 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3의 장소나 살아있는 도시에선 이웃들이 항상 부모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아니, 소란스럽게 하는 아이가 ‘문제’가 되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죠. 왜냐면 아이들은 공공장소에서 어른들과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러웠으므로 알아서 예절을 지켰고, 혹은 조금 소란스럽더라도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니까요.

제3의 장소가 가진 귀중한 기능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편안하게 즐기게 한다는 점에 있다. 이제는 그런 곳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세대간에 만연한 적대감과 오해[...]부모가 이웃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시절에는 육아가 더 쉬웠다. 예전에는 우리 아이를 알고 지켜봐주며 곁에서 놀게 해주는 이웃이 있었다.-레이 올든버그, <제3의 장소>(이하 동일)

제3의 장소는 관계의 해방구가 되기도 합니다. 올든버그는 제3의 장소의 가장 큰 매력으로 부모로서의 자아나 직업, 신분, 나이에 기대되는 자아를 내려놓고 자유롭게 누구나와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제3의 장소’에선 언제든 혼자서 훌쩍 가도 그날그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통상 가족이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만 어울리곤 하는 현대인에게 소중한‘한 숨 쉴만한’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역사학자 필리프 아리에스는 근대 도시 발전이 제3의 공간같은 관계를 없애버림으로써 “마치 비대해진 세포같이 가족의 역할이 과도하게 확대되었다”고 말합니다. 마가릿 애트우드는 결혼 관계의 부부가 서로에게 친구, 동료, 비서, 이웃, 간호사 등의 모든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에 파경에 이른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펍 등 일상을 그린 화가  Edward ardizzone의 그림 ‘Saloon bar at the local’. 지역에 위치한 살롱 바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는 일상적 모습을 그려냈다. 출처: Tennants UK

영국의 펍 등 일상을 그린 화가 Edward ardizzone의 그림 ‘Saloon bar at the local’. 지역에 위치한 살롱 바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는 일상적 모습을 그려냈다. 출처: Tennants UK

이런 경험은 완벽한 배우자와 모범적인 아이와 함께 값비싼 주택에 산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레이 올든버그는 도시의 숨구멍이 되는 ‘제3의 장소’가 단순히 좋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적극적으로 추구해나가야할 가치라고 주장합니다.

도시 차원에서 보자면, 주거용이라든지 업무용처럼 용도에 따라 ‘구획된’ 도시가 아닌 활기 넘치는 도시가 된다면 부모들은 안심하고 도시를 ‘선생님이자 보호자’로 임명할 수 있게 됩니다.

올든버그와 제이콥스는 아이가 거리를 어슬렁대면서 도시의 거리를 통해 배울 권리를 강조하는데요. 여기서의 거리는 물론 거리를 지켜보는 어른들과 안전하게 모험할 수 있다는 전제를 포함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엄청난 수고와 시간, 돈을 소모해야 하는 부모의 짐도 상당부분 덜어질 수 있습니다.

주거단지의 무균실화는 사무실에서 나타나는 폐해를 곧바로 집안의 난롯가로 가져다놓았다. 가족들과 일정을 조정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일이 비일비재해졌고, 특히 교외에서 자녀를 키워보면 집이 직장보다 더 빡빡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녀에게 집과 학교 외의 경험을 하게 하려면 먼 곳에서 열리는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차로 데려다주어야 한다. 동네 공터에서 수시로 하던 공놀이는 조직화된 유소년 야구단으로 대체되었다[...]동네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거리가 거의 없으므로 부모들은 다양한 여름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포리스트 론(네브라스카주의 공원형 묘지)처럼, 공동묘지도 외관은 멋질 수 있다.

■맺음말

‘아이가 진짜 민폐냐’는 물음은 어쩌면 노키즈존 논란에서 부차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의 아이는 실제로 예의가 부족하고 사회생활의 규칙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다양한 또래나 (부모가 아닌) 다양한 어른들과 ‘어슬렁’대고 어울리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을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를 민폐 취급하고 사회에서 아예 배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누군가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사람 됨을 연기할 수 있는 상호작용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쉽게 말해 상대방이 나를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교류해야 그 안에서 배우며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로버트 파우저의 책 <외국어학습담> 속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왕초보 이탈리아어 실력을 가지고 이탈리아 여행을 훌쩍 떠났는데요. 이탈리아 원어민들은 정작 언어가 서툰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고, 같이 언어 실력이 어설픈 외국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외국인은 그를 무시하지 않고,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면서 입모양을 크게 발음하고 쉬운 단어를 쓰는 등 보조를 맞춰줬기 때문이죠. 즉 이탈리아 원어민들은 ‘불완전한’ 그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겁니다. 마치 불완전한 아이를 인정하지 않고 ‘민폐’ 취급하는 어른들처럼요. 이때 과연 로버트 파우저를 두고 그가 ‘민폐쟁이 언어바보’이며, 이탈리아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요?그는 단지 원어민과 소통하고 배울 기회가 없었을 뿐인데요.

어쩌면 아이가 사회 규약을 배우는 것은 사람이 낯선 언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알파벳도 더듬대는데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 ‘쏼라쏼라’를 기대하고 있다면 기가 죽을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완벽함을 기대하는 사회에선, 당연히 외국인 등 외부인에게도 높은 장벽을 세울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선 모든 부분에 있어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금세 ‘민폐’로 튕겨져 나옵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시작은 ‘아이가 행복한 도시’였지만 결국은 ‘아이와 어른 모두가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출생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정부나 언론은 청년 일자리, 돈이나 부동산(돈과 아파트가 없어서 다들 결혼 ‘못’하고 애 ‘못’낳는다!) 등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에 앞서 재생산이 불가능한 사회가 뭘 의미하는지에 대해 한번쯤 깊이 고민해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아이가 살기 좋지 않은 사회는 인구·경제적인 차원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차원에서 모두를 더 살기 나쁘게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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