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물난리 겪은 시민들
약속 미루거나 ‘슬리퍼 출근’
반지하 주택 피해 재현 우려
지난달 80년 만의 폭우로 물이 목 높이까지 차올랐던 서울 서초구 서초동 진흥아파트 근처에 사는 직장인 이어진씨(31)는 5일 하루 일정을 포기했다.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비가 쏟아지자 ‘8월의 악몽’이 되풀이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폭우로 이씨 동네에서 실종되거나 사망한 사람만 4명에 달한다.
이씨에게 가장 큰 공포는 흙탕물 아래 숨겨진 맨홀이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강남 맨홀 뚜껑 사망 사건을 다뤘는데 너무 무서웠다”면서 “비가 오는 날엔 밖에 나가면 안 되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이씨는 재택근무로 전환하고 친구와 약속한 저녁 식사도 취소했다.
힌남노의 영향으로 전국에 비가 쏟아지자 시민들은 저마다 폭우에 대비했다. 서울 강북구 주택에 살고 있는 김모씨(26)는 전날 오후 집 정비에 한창이었다. 김씨는 마당 화단에서 흘러나온 흙과 나뭇잎이 배수구를 막지 않도록 삽과 젓가락으로 구멍을 뚫었다. 지난 8월 배수구를 정리하지 않아 마당이 물바다가 된 뒤 얻은 교훈이었다.
옥상에 있는 집기와 화분, 캠핑장비도 모두 집 안으로 들였다. 김씨는 “저번 폭우 때 바람이 많이 불어 옆집 감나무가 집 쪽으로 넘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비슷한 사고를 막기 위해 집을 치우고 있다”고 말했다.
출근길 풍경도 달라졌다. 직장인 A씨는 이날 구두 대신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출근했다. A씨는 “태풍 때문에 비가 많이 올 것 같아 슬리퍼를 신었다”고 말했다.
반지하 주택의 피해가 재현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지난 4월부터 서울 동대문구 반지하 자취방에서 생활 중인 최휘주씨(26·동국대 4학년)는 “저번 수해 때처럼 반지하 거주민들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폭우가 내린 지난달 9일 최씨의 집은 지대가 높아 침수를 피했지만, 같은 시간 신림동 반지하에선 일가족이 방을 빠져나오지 못해 숨졌다.
최씨는 “수해 참사가 있고 나서 피해자들에게 별다른 거주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면서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니 비가 올 때마다 같은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정부가 정확한 대책을 발표해 불안을 줄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