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책고집’ 대표

여든여섯에 생을 마감하신 어머니는 예순이 넘도록 글을 모르셨다. 한학자이자 서당 훈장이셨던 외할아버지가 학교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머니와 두 이모는 문맹의 삶을 살아야 했다. 대를 잇기 위해 들였던 양자는 재산을 죄다 빼돌리고 도망가 버렸다. 그예 외갓집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출가해 시집살이에 시달렸던 데다 글을 몰랐던 세 자매는 어찌해볼 수도 없이 친정을 잃어버렸다.

최준영‘책고집’ 대표

최준영‘책고집’ 대표

어머니는 예순이 훌쩍 넘은 후에야 한글을 배우셨다. 손수 쓴 글을 보여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큼지막한 도화지에 당신의 이름 석 자를 삐뚤빼뚤 써놓으시고는 쑥스럽게 내밀던 그 모습. 어떤 연유로 글을 배우기로 하셨는지는 뒤에서 밝히겠으나, 우선은 문명의 세계로 넘어오신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을 이야기해야겠다.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신문을 구독했다거나, 독서삼매경에 빠져들더라고 말하는 건 빤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세상만사 귀찮아만 하시던 어머니는 글을 깨우친 뒤로 이전과 확연히 달라지셨다. 무엇보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소신껏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관심은 곧 질문으로, 소신은 종종 논평으로 이어졌다.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거시 사실이냐? 난 그러치는 않다고 생각한다.” 논평 또한 찰졌다. “정치 허는 거뜰, 남 헐뜯기가 여간한 거시 아니더라, 니는 정치하지 말아라.”

그 덕분에 알게 된 것이 있다. 글을 배운 뒤 가장 먼저 쓰는 말은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무릎을 쳤다. 글을 안다는 건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게 되었음이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하나 더 있다. 글을 안다는 건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함이다. 글눈이 열린 뒤로 어머니는 외면하기만 하던 TV 뉴스를 열심히 시청했다.

이쯤에서 어머니의 눈물겨운 문맹 탈출기를 소개할 때가 된 듯하다. 그런데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종일 트로트를 따라 부르던 것 말고는.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트로트를 들으셨다. 아마도 수십곡에서 그 이상의 트로트 곡을 외우는 경지에 도달하셨을 성싶다. 도통 유흥이라는 걸 모르는 분이셨다. 남편 복, 자식 복은 바라지도 않았고 지겨운 일복만 타고났다고 장탄식하던 분이었다. 그런데 트로트에 빠져든 뒤로 다른 사람으로 변하셨고, 그러던 어느 날 마치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의 ‘한나’가 ‘미카엘’에게 편지를 보내듯 직접 쓴 글씨를 불쑥 내밀었다. 집에서 귀로 듣고 입으로 부른 것을 어머니한글학교에 가서 다시 따라 부르면서 직접 써보는 방식으로 한글을 익히셨던 터다. 트로트 덕분에 어머니는 문맹의 한을 털어내셨다.

그 뒤 어머니의 삶은 오롯이 ‘트로트 인생’이었다. 트로트를 따라 부르면서 서서히 정신의 긴장을 내려놓으셨고, 여든여섯에 생을 마치셨다. 요양원에 계시던 때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코끝이 시큰해진다. 나는 이따금 어머니의 정신이 맑아 보이면 기회다 싶어 말을 걸었다. “엄마, 여기가 어디야?” 어머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응, 수덕사.” 의식이 점점 흐려져 아들과 며느리, 손녀들까지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린 뒤에도 애창곡 ‘수덕사의 여승’만은 잊지 않으셨다. “어머니 여기가 어디에요?” “응, 수덕사지.” “어디라고요?” 다시 물으면 대답은 역시 “수덕사”였다.

평소 트로트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추석 특집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즐겁게 봤다. 쉽고 잘 들리는 가사, 호소력 짙은 목소리, 익숙한 멜로디까지.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훈아쇼의 여운이 쉬 가시지 않는다. 신곡 ‘테스형’은 국회까지 진출했다. 나는 4년 전 이맘때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조용히 ‘어매’를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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