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저널리즘 그리고 판타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SBS TV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한 장면.

SBS TV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한 장면.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판타지이다.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이상이 영화엔 종종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어려운 것이 허구의 세계에서는 실현되곤 한다. 사필귀정이나 공명정대와 같은, 세상의 정의로운 흐름 같은 것 말이다. 영화를 구매하는 비용 중 일부에는 판타지 구매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건전한 기대감과도 같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코로나19 확산 후 모든 대중집합시설에선 방역을 위해 몇 가지 검문 과정을 요구한다. 영화관도 그렇다. 개인정보를 기록하고, 체온체크를 하는 재래적 방역 수준을 넘어 QR코드가 일상화된 지 오래고 그마저도 프랜차이즈 나름의 고유한 플랫폼으로 제공된다. 극장에 가서 판타지 세계로 돌입하는 데 간단한 예매면 끝나던 시절에서 단 하나의 입구 앞에 줄을 서 통과해 입장한다. 영화 <토탈리콜>에서 봤을 법한, 예감했으나 이렇게 빨리 올지 몰랐던 SF적 미래의 도래 앞에서 판타지 구매도 쉽지 않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최근 우리 사회에 자주 호명되는 개혁 대상들도 영화적 판타지의 주요 소재라는 점이다. 한 해를 돌아보았을 때, 기득권이라는 말과 함께 고쳐야 하는 힘들로 이야기되었던 검찰, 언론, 의료계와 같은 엘리트집단들 말이다. 검찰이 수사 주체가 아니라 개혁 대상처럼 떠오른 즈음 막을 올린 <비밀의 숲> 두번째 시즌의 형편이 딱 그랬다. 검찰의 자정 능력을 판타지로 제공했던 <비밀의 숲> 첫번째 시즌과 달리 두번째 이야기는 오히려 현실이 더 드라마틱하다는 역설적 평가에 직면했다.

전공의, 심지어 학생인 의대생마저 동참했던 의료인 파업도 그렇다. 의사 드라마가 주류 드라마로서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몇 안 되는 나라가 미국과 우리나라이다. 두 나라 모두 의사들이 고수익을 얻는 직업이라는 특성을 공유한다. 벌써 15년째 시즌을 이어가고 있는 굴지의 의학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는 종종 이런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외과의사에게 있어서’ ‘외과의사는’과 같은 잠언투 문장인데, 이런 내레이션은 외과의사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배타적이지만 꽤나 권위적이라는 가설 위에 가능하다. 의사의 삶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판타지의 일부임을 활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론에 대해 신뢰감을 잃었다고 말한다. 언론의 자유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신뢰도가 이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날아라 개천용>의 기자가 흔히 말하는 레거시 미디어 혹은 전통적 의미의 언론사에 근무하는 기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날아라 개천용>의 기자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류대 출신의 엘리트 기자가 아니다. 막노동부터 시작해 다양한 삶의 체험을 쌓은, 움직이는 만큼 글을 쓰는 기자로 묘사된다. 어떤 점에서, <날아라 개천용>의 기자는 우리 사회가 언론에 요구하는 판타지로서의 기자상이 반영돼있다고 볼 수 있다. 많이 배워서, 편하게 책상에 앉아, 이 언론사나 저 언론사나 다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속도전처럼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내놓는 기자가 아니라 발로 뛰고, 시간을 들여결국 하나의 사실을 건져 올리는 기자, 그런 이상적 기자 말이다.

<날아라 개천용>의 기자는 탐사보도전문 매체인 ‘셜록’의 박상규 기자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실제 시나리오 집필에 참여하기도 했다니, 박상규 기자가 몸소 실천하는 제도권 외부의 기자 정신을 드라마의 판타지로 녹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와 저널리즘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영화가 바로 <스포트라이트>와 <더 포스트>이다. 훌륭한 저널리즘 영화를 말할 때 여전히 우리 영화가 아니라 수입 영화를 말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두 영화에 비견할 만한 국내 사례를 찾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다. <스포트라이트>는 탐사보도에 대한 이야기이고, <더 포스트>는 편집장과 사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언론소비자로서 관객이 원하는 저널리즘의 갈증을 푸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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