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균형감각

성종은 신구세력의 협치를 원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옥좌에 올랐고, 그때 조정은 기득권층인 훈구파로 가득했다. 성종은 그들을 견제하려고 개혁을 바라는 신진사류를 조금씩 끌어들였다. 세월이 흐르자 조정 안에는 신진사류의 숫자가 늘어났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졌다. 알다시피 신진사류는 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한 선비들이었는데, 왕은 그들을 언관으로 삼아 조정의 잘잘못을 따지게 했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이러한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언관들은 훈구세력의 부정부패를 파헤쳐 고발하고, 그들을 호되게 비판했다. 신진사류가 훈구세력을 적절히 견제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성종이 내심 기뻐했다.

그런데 신진사류의 정치적 지위가 강화되자 벼슬이 없는 유생들까지도 고무되었다. 그들도 국정 현안에 관하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성종 23년 12월, 성균관 생원 오익신 등은 조정 대신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들은 훈구파 대신들이 불교에 대한 통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생들의 논조는 과격하기 짝이 없었다. “저희들이 살피건대 영의정이 전하를 간사한 말로 유혹합니다. 분하고 원통함을 참지 못하겠습니다. …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대신만 소중하게 여기십니까? 그 때문에 저희의 주장이 지나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유교(吾道)를 북돋우는 것은 전하의 책임입니다. … 승려를 당장 없애라는 명령을 내리십시오. 만약 그렇게 조치하신다면 대신들을 지나치게 비판한 죄를, 저희는 감수하겠습니다.”

이처럼 과격한 상소문이 전달되자 성종은 잔뜩 긴장했다. 왕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기강이 흔들릴까 봐 염려했다. “내가 그대들의 뜻을 안다. 그러나 이 상소를 올린 그대들이 어찌 고금의 이치에 통달하고, 사물의 본질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학문을 했다면 <중용>에서 가르치는 바, ‘대신을 공경한다’는 구절도 배웠을 것이다. … 대신을 존중하는 것이 내 뜻이다. 그대들은 내가 대신을 존중하는 줄 빤히 알면서도 대신을 모독하는구나.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실록>, 성종 23년 12월5일)

성종은 조정 대신들에 대한 신진사류의 비판이 도를 넘었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애초 그가 바랐던 것은 신구세력의 적절한 균형이었으나, 그들 사이에서 균형잡기가 어려웠다. 신진과 훈구 두 세력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에 집착했다. 그들의 갈등을 조절하느라 성종은 진땀을 뺐다. 그래도 왕의 지혜와 성품이 넉넉해 큰일은 피할 수 있었으니, 그만하면 성공이었다.

성종의 옥좌를 물려받은 이는 연산군이었는데, 그는 본래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용납되지 못할 일이었다. 신진사류는 연산군의 태만을 문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연산군 6년(1500) 11월29일에 사헌부 장령 김물이 왕의 공부를 채찍질했다. “이 책들은 성리의 근본을 논의한 것입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근본이 거기에 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전하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마소서.”

그러나 사람의 기질과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겠는가. 연산군은 경연을 귀찮아했고, 신진사류의 간언을 매우 싫어했다. 결국에는 두 번씩이나 사화를 일으켰는데, 한 번은 신진사류를 일망타진하려 했다. 또 한 번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기득권층까지 몽땅 조정에서 축출하려 했다. 그러자 궁중 쿠데타가 일어나 연산군은 폭군으로 낙인찍힌 채 몰락했다(중종반정).

우리가 속한 사회가 크든 작든, 취향이 다른 이질적 집단이 공존하며 경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연산군처럼 제 입장만 고집하면 망하기 쉽다. 성종이 그랬듯이 상이한 이익집단을 모두 존중하며 지혜롭게 균형점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어느 모로 보든 한쪽으로 치우쳐도 너무 치우친 세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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