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보자

이범준 사회에디터

“수습기자 시절 경찰에 출입했는데 좀처럼 취재원들과 친해지지 못했다. 본래 낯을 가리기도 하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자를 비롯한 모든 수습기자가 경찰관을 형님이라 불렀는데, 유독 나만 그 말이 안 나왔다. 평소에도 누구를 형님이라 부르는 성격이 아니라 공무원에게 그러기는 더욱 어려웠다. 결국 형사님이란 호칭으로 경찰기자 생활 2년을 보냈다.” 5년 전 대한변협 기관지에 쓴 잡문이 생각난 건, 얼마 전 노원명 매일경제신문 부장의 칼럼을 읽으면서다. “외부와 점심 약속을 잡지 않고 동네 골목식당만 가는 선배가 있었다.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신세질 일 없다’는 독립정신이었을 것이다.” 내게 이런 독립정신까지는 없었고 그저 혼자 있기를 좋아해 약속이 별로 없고, 그래서 사적으로 가까운 취재원도 적다. 취재원은 본질적으로 직무 관계이고, 따라서 사적 친분보다 직업적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이범준 사회에디터

이범준 사회에디터

10년 전인 2011년 법원 직원들이 수입인지와 수입증지를 재사용해 국고를 가로챈다는 기사를 썼다. 민원인이 새 인지를 소송서류에 붙여 제출하면, 직원이 미리 갖고 있던 소인 찍힌 헌 인지와 바꿔치기하는 수법이었다. 법원 내부에서 제보를 받았다. 보도 이후 대법원이 감사에 착수해 비리를 저지른 직원들을 파면하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전국 5개 검찰청에서 법원과 직원을 수사했다. 그런데 검찰 수사를 앞두고 40대 법원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알량한 정의감 때문에 한 집안이 고통을 겪게 됐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기자가 제보를 뭉갤 수는 없다며 스스로 위로했다. 자기합리화와 자기비하를 거듭하며 시간을 버텼다. 이후로 사실(事實)을 다루는 일에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다 2017년 사법농단 기사를 썼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에 발령받은 판사가 부당한 지시를 받아 사표를 냈다는 내용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아는 대로 그 판사는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언론은 그를 사법농단 폭로자라고 했다. 하지만 이탄희 판사는 “나는 경향신문 기사와 무관하다”고 거듭 밝혔다. 나는 지금까지도 취재원을 말한 적이 없다. 변변찮은 기자이지만 그래도 취재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직업윤리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2020년 조선일보가 이 기사 제보자가 누구라고 특정했다. 자신의 취재원도 아니고 남의 취재원을 밝히는 기사였다. 게다가 기사를 쓴 기자는 인권수호가 사명이라는 변호사이기도 했다. 사실이 아니면 반박을 해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취재원이 아니라고 밝히는 것도 간접적으로 취재원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다만 적절한 때가 되면 말하고 싶었다. 언론이 제보자를 끌어내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이제 말하지만, 그 기사는 오보이다.

사법농단 기사 이후로 얼마 되지도 않던 취재원이 사라졌다. 적잖은 사람이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판사를 계속하는 사람도, 로펌으로 옮긴 이도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듬해인 2018년 다시 대법원의 전자법정 입찰비리 기사를 쓰게 됐다. 법원행정처가 전자법정 업자와 짜고 17만원짜리 영상·음향 장비를 225만원에 사들이며 거액의 뇌물을 받은 비리다. 검찰이 수사에 들어가 법원 공무원과 업체 관계자 14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런데 제보자는 전자법정 입찰비리 업체 직원이었다. 검찰이 기소했지만 법원이 공익제보를 인정해 사실상 무죄인 선고유예를 내렸다. 항소심 법원은 “법원행정처의 감사와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이 사건 입찰비리 및 뇌물 범행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고 했다. 이때도 제보자를 드러낸 언론이 있었다. 한겨레가 2019년 ‘전자법정 입찰비리 공익제보자, 알고보니 핵심 공범… 공익제보자라기보다 사익제보자’라고 검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기사를 읽으며 나를 되돌아보았다. 주변에 기자가 없어 e메일로 연락해온 제보자와, 고급정보를 쥐고 있는 취재원을 저울질한 적은 없는지.

이 전자법정 입찰비리 제보자를 상대로 대법원이 최근 거액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임기 마지막 해인 2023년 완성을 목표로 3000억원 가까운 국가예산을 쓰는 스마트법원(전자법정)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주 대법원 국정감사에서는 “앞으로 비슷한 사업 발주가 많아질 텐데 사업자들한테 ‘우리가 막아줄게’ 이런 사인을 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언론에서 다시 법원에서 외면당하는 제보자에게 더는 해줄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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