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비워서 채우려는 나무의 안간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낙엽, 비워서 채우려는 나무의 안간힘

가을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 캠퍼스는 가을 풍경이 정말 멋지다. 교목인 은행나무가 환한 노란빛으로 온통 꽃핀 듯 변하고 교내 여러 나무가 울긋불긋 단풍으로 색색이 물든다. 가을에 접어들어 단풍으로 물든 나무는 오래지 않아 낙엽을 떨군다. 더운 날씨가 일년 365일 이어지는 열대의 나무는 잎을 떨굴 필요 없고, 추운 날씨만 이어지는 고위도 지역 상록수는 약한 햇빛을 일 년 내내 이용하려 사시사철 푸르다. 우리 눈을 즐겁게 하는 멋진 가을 단풍은 우리나라의 적당한 위도 덕분이다. 가을날 단풍 들어 낙엽 진 나무는 다음해 봄 푸른 잎을 틔워 여름날 무성한 녹음을 다시 이룬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나무의 푸른색은 태양에서 오는 빛에너지 중 파란색과 빨간색 부분의 파장을 엽록소가 주로 이용해 광합성을 하기 때문이다. 파란색과 빨간색, 그리고 푸른색이 모두 함께 있으면 흰빛이다. 태양이 준 전체 흰빛에서 나무가 이용하는 파란색과 빨간색을 빼면 푸른 녹색이 남는다. 여름날 나무의 시원한 푸른빛은 자신이 쓰고 남은 빛을 흔쾌히 내어주는 선물인 셈이다. 나무가 여름날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은 또 아니다. 단 한 줄기 소중한 햇빛도 허투루 땅으로 보내지 않고 남김없이 모두 받아 이용하는 것이 나무에게 유리하다. 그 아래에서 쉬는 우리에게 넓고 시원한 그늘을 나무가 만들어 주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모든 나뭇잎을 가능한 한 넓게 펼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나무가 진화한 결과다.

가을날 멋진 단풍도 나무가 의도한 선물은 아니다. 나무는 뿌리에서 끌어올린 물과 고마운 해가 보내주는 복사에너지를 함께 이용해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만들어 살아간다. 가을에 접어들면 햇빛의 양이 줄어 광합성을 활발히 하기 어렵고, 여름에 우거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상대적 비용이 늘어난다. 공급이 적을 때에는 소비를 줄이는 것이 상책이다. 잎을 떨궈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나무의 현명한 선택이 가을날 단풍과 낙엽인 셈이다. 나무는 겨울에 유지할 필요 없는 잎을 떨구기 위해 먼저 잎을 향한 물의 공급을 끊는다. 나뭇잎 세포는 죽고, 그 안에 담긴 푸른빛 엽록소도 사멸한다. 엽록소에 가려 빛 못 보던 다른 생체 분자들의 다채로운 빛의 향연이 드디어 시작된다. 우리가 보는 가을날 울긋불긋한 단풍은, 겨울을 버티려 스스로 몸 일부를 떨구는 과정에서 나무가 잠깐 보여주는 멋진 선물이다.

영하의 기온인 추운 겨울날 나무 안의 물이 얼면 큰 문제다. 냉동실에 넣은 콜라병이 얼면 부피가 팽창해 병이 깨지고, 언 채소는 다시 녹여도 원래의 싱싱함을 잃어버린다. 얼 때 파괴된 세포가 녹인다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름날 푸르렀던 잎을 떨구지 않고 겨울을 보낸다고 해서, 겨울에 얼었다 봄날 녹은 푸른 잎을 다시 나무가 이용할 수는 없다. 겨울날 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무는 답을 알고 있다. 가지고 있는 물을 줄이는 방법이다. 소금을 뿌리면 얼음이 녹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농도가 높은 물은 어느 정도 낮은 온도에서도 액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가지고 있는 물의 양을 줄여 수액의 농도를 높이면, 추운 겨울날에도 나무의 속살은 얼지 않는다. 겨울이 다가오면 나무의 관심은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 된다. 버리고 줄여 긴 겨울을 버틴다. 가을날 단풍과 낙엽은 나무가 내년 봄 삶의 지속을 바라는 안간힘의 결과다. 올겨울 버티지 못하면 다음해 성장도 없고, 나무는 삶의 지속을 위해 가을날 몸의 일부를 버린다. 가을날 다채로운 단풍에 감탄하며, 지속을 위해 버리는 나무의 고통을 떠올린다.

다가올 시간을 버티려 가진 것을 스스로 버리는 나무를 생각한다. 내년에도 생존을 계속하기 위해 지금의 커다란 변화와 고통을 감내하는 나무를 보며 세상을 배운다. 생각이 이어진다. 기후위기의 궁극적인 해결을 위해 우리 모두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더 많이 배출하고 더 많이 다시 거두는 삶이 아니라, 더 적게 배출해 조금만 다시 거두어도 되는 삶이 더 지속 가능한 것은 아닐까. 가을날 단풍과 낙엽을 다시 떠올리며 내 삶을 생각한다. 더 많이 가져 더 지켜야 하는 삶보다 적게 가져 지킬 필요도 없는 삶이 더 현명한 삶이 아닐까. 비우고 버려야 새롭게 채울 수 있다면, 가진 것보다 비울 것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가을날 멋진 단풍을 보며 내가 비워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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