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엄마들의 ‘멀리 돌아가는 길’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통근길은 경로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은 돼야 한다. 거리와 소요 시간이 모두 짧은 최적의 길을 미리 알고 있는 나는 꽤나 돌아가지만 하천변에 벚나무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길, 신호등이 많고 자주 정체되지만 큰 횡단보도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길을 대안으로 마련했다. 일의 효율을 숫자로 놓고 따지던 때엔 절대 하지 않았던 낭만적인 행위다. 그러나 이 일상이 적어도 20년 이상은 반복될 것이라는 걸 깨달은 뒤엔 미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어찌 보면 일이 아닌 삶 전체의 효율을 위해 모색한 방안인 셈이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할머니가 죽고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뒤 나는 조금 달라졌다. ‘금쪽이’가 되어 채우지 못한 유년기의 애착을 갈구하는 시간보다 엄마와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상상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손녀로, 딸로 보살핌받던 혈육의 애틋함과 함께 이미 한 세월을 버티고 살아낸 여자들에 대한 존경심은 세상을 대하는 나의 날 선 태도를 조금씩 누그러트린다. 이렇게 삶이 변할 때 찾아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전혀 낯섦이 없다. 1년 반 만에 극장에 가서 두 편의 영화를 봤다. <왕십리 김종분>과 <너에게 가는 길>이다.

50년째 왕십리역 앞에서 노점을 운영하는 80대 여성 김종분에겐 두 가지 모습의 삶이 있다. 반찬을 나눠 식사를 함께하고, 10점 내기 화투를 치고, 서로의 점포를 돌보며 낮잠을 청하는 노년 여성 공동체의 일원 김종분의 삶과 자식을 앞세운 애통함을 삼키고, 죽은 딸의 뜻을 이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참석하며 목소리를 내는 민주화 운동가 김종분으로서의 삶이다.

<왕십리 김종분>은 1991년 노태우 정권에 항거하는 학생 집회 중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 김종분에 대한 이야기다. ‘열사의 어머니’라는 거룩한 위로에도 “작은딸 덕분에 내 세상이 더 넓어졌다”고 말하는 그의 매일은 성실하고, 독립적이다. 그가 부지런히 살아내는 일상은 쉽지 않은 길을 택한 딸의 죽음을 현재와 연결하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했던 모녀의 긴 투쟁을 시민사회의 희망으로 확대시킨다.

<너에게 가는 길>에도 ‘자식 덕분에 내 세상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엄마들이 등장한다. 성소수자 자녀를 둔 ‘비비안’과 ‘나비’는 각각 항공승무원과 소방공무원으로 오래 재직해온 여성들이다. <너에게 가는 길>은 자녀의 커밍아웃으로 인한 마찰이 차지하던 자리에 두 여성의 삶을 배치한다. ‘여성’으로 각자의 사회에서 버티며 살아왔던 두 사람의 경험은 자녀의 소수자성을 포용하는 과정을 단축시키고, 그들이 일상에서 받는 위협에 함께 분노하고 연대하게 만든다. 자식을 계기로 과거와는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었지만, 이들의 얼굴은 나이에 관계없이 인간은 더 넓은 세상을 포용하며 성장할 수 있다는 환희로 가득 차 있다.

‘쉽게 가는 길 No No 멀리 돌아가 OK.’ 에프엑스의 노래 ‘Kick’을 재생하면 이 가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속으로 따라 부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대목이지만 들을 때마다 나는 멀리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미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돌고 돌아 출근하는 나처럼, 쉽게 갈 수 있도록 잘 닦인 길을 거부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보편성이 버겁고, 빠른 것을 유도하는 사람이 의심스럽고, 돌아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약하면서도 강한 이유들이. 그들은 대부분 쉽게 가는 길을 몰라서, 혹은 방해를 받아서 ‘돌아가는 길’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과 기꺼이 동행한다.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이해하고 지지하며 그 영향을 통해 자신의 삶을 넓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길 위에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묵묵히 다른 이들의 숨통을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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