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진정한 성평등의 길

반했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가 덕임에게 홀딱 반했다. 성덕임은 조선시대 궁녀다. 밝고 영리한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주도적이다. 위태한 처지에서도 자신이 섬기는 세손 이산을 지키고자 나서고 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의견을 말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도 덕임에게는 해당이 없다. 경쟁자도 품을 줄 아는 덕임은 상대를 배려하고 의리를 지킨다. 성별을 떼고 보아도 매력적인데 사극 속 여성으로는 흔치 않은 인물이라 더욱 눈이 갔다. 중전이 되면 칭찬이 자자할 테고 왕이 되어도 성군이 되었을 것이다.

하수정 북유럽 연구자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인물평을 듣게 된다. 할 말 할 줄 알고 맡은 일에 헌신적이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두고 ‘추진력이 있다’ ‘리더감이다’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다’라고 평한다. 한데 이런 평가는 대부분 남성에게 향한다. 해당 인물이 여성일 경우 ‘기가 세다’라는 말로 ‘퉁치는’ 일이 많다.

만약 일터에 살갑고 다정하게 타인을 챙기고 잘 웃는 사람이 있다면 여성일 경우 두루 좋은 평을 듣는다. 그다지 재밌지 않은 말에도 손뼉을 치며 웃어주고 반응해주면 - 그 역시 사회생활에 있어 중요한 능력이다 - 업무 처리가 좀 부족하더라도 그 이상의 평가를 받는다. 반면 남성이 그런 성향이라면 되레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잘하는 영역이 다른데 성별로 누군가의 능력과 잠재력을 제한할 필요가 있을까?

어릴 적에 달리기를 잘했던 나의 목표는 ‘제일 빠른 여자애’가 아니라 ‘제일 빠른 애’였다. 학창 시절 내내 성별과 상관없이 어울리고 경쟁하며 지냈다. 일하며 만나는 이들도 성별이나 상하관계로 분류하기보다 동료로 대한다. 상대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는게 편하다.

어느 날 생수통을 교체하려고 입구를 거꾸로 세워 들다가 발을 찧었다. 우당탕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아픈 것보다 수치스러웠다. ‘Girls can do anything’(여성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인데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한 남자 선배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답하길 “그건 남녀의 차이가 아니야. 생수통은 나도 못 들어. 전에 한번 들다가 사무실 온 바닥에 물을 쏟아서 다들 근처만 가도 말리거든. 생수통 교체는 여자라서가 아니라 노약자가 하기 어려운 일이고, 사람마다 강점이 다른 것 아닐까? 만약 누군가 외국어를 수정씨만큼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수치스러워하거나 부탁을 미안해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고마운 충고였다.

노르웨이는 2003년부터 공기업과 상장기업의 임원 중 여성을 최소 40%가 되도록 하는 여성할당제를 도입했다. 제도가 시행되었을 때 반응이 궁금해 한국에 주재했던 노르웨이 외교관 마리안 담하우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노르웨이는 이미 한국보다도 훨씬 평등한 사회인데 굳이 할당제를 할 필요가 있었는지, 여성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아닌지, 남성이 반발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답변이 흥미로웠다. 교육의 기회도 평등하고 경쟁의 기회도 열려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과거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관습과 인맥은 여전히 남성 중심이다. 이 때문에 능력이 있음에도 여성이어서 그 자리에 임명하는 것에 대한 주저함을 희석하기 위해 약간의 넛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처음에는 여성할당제에 대한 반발과 의구심이 있었지만 시행 후 자리가 잡히고 나서는 조직 내 만족도도 올라가고 경영 성과도 좋아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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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당제 초창기에 임원이 된 여성의 면면을 살펴보면 같은 직급의 남성에 비해 젊고, 학위가 있거나 유학을 다녀온 이가 많다고 했다. 이들은 이사회 안에서 다른 의견을 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 내부 만족도가 올라갔고 이후 자연스레 능력 있는 젊은 남성, 성소수자, 이민자 등 이사회 안에 다양성이 증가했다고 평했다. 남녀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는 공감대가 생겼다. 능력이 부족한데 여자라서 승진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부정적 인식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능력 없는데 승진하는 남자도 얼마든지 있어!” 하며 웃었다.

지난주, 마그달레나 안데르손 전 스웨덴 재무장관이 새 총리로 선출됐다. 스웨덴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지 100년 만에 탄생한 첫 여성 총리라 언론도 크게 다뤘다. 다른 당 남자 의원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이 순간이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다. 지금까지 스웨덴 정치에 뛰어난 여성이 많았음에도 이제야 여성 총리를 배출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평등을 주장할 때에는 늘 상대가 존재한다. 너와 나 모두에게 득이 된다는 양쪽의 확신이 있어야만 진정한 평등으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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