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는 인기 감당할 자신 있나

최희진 스포츠부 차장

프로야구 선수가 음주운전으로 입건됐는데도 징계가 8경기 출장 정지에 그치던 시절이 있었다. 2010년 A선수가 음주 뺑소니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자 한국야구위원회는 상벌위원회를 열어 A에게 잔여 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내렸다. 당시 잔여 경기 수는 정규리그 8경기, 포스트시즌을 포함해도 총 18경기에 불과했다.

최희진 스포츠부 차장

최희진 스포츠부 차장

10여년이 흐른 지금 이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팬들이 프로 선수들에게 들이대는 도덕성의 잣대가 더 엄격해졌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로 팬들의 의견을 구단에 전달할 통로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팬들의 목소리가 과거보다 커지면서 구단이 ‘팬심’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구단의 대처가 과거보다 신속하고 강력해졌다.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데는 프로야구가 국내 4대 프로스포츠 중 가장 인기가 많았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인기가 많으니까 지켜보는 눈이 많고, 사건이 터졌을 때 여론이 와글와글 뜨겁게 달아오른다. 구단의 일거수일투족이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있다. 구단이 팬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다.

이제 프로배구가 그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입장했다. 여자배구에 쏠리는 관심은 역대 최고 수준이다. 지난 시즌 ‘월드클래스’ 김연경(중국 상하이)이 국내 리그에 복귀하자 여자프로배구는 2005년 출범 이래 최고인 1.29%의 평균 시청률을 기록했다. 2020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4강 진출은 더 많은 팬들을 배구로 끌어들였다. 배구는 올 시즌 ‘꽃길’을 걷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일들은 프로배구가 과연 이 인기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보는 눈이 많아지고 팬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구단들은 팬들의 눈치를 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다.

남자프로배구 대한항공은 데이트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던 선수 정지석을 사실상 자숙 기간 없이 코트로 복귀시켰다. 정지석이 구단에서 받은 징계는 3경기 출전 정지가 전부였다.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프로 구단이라면 팬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징계를 내렸어야 하지 않을까. 배구 팬들은 ‘여자 때리는 선수는 보고 싶지 않다’며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지만 구단은 이런 목소리에 귀를 막았다.

여자프로배구 IBK기업은행도 마찬가지다. 선수 조송화와 김사니 코치가 감독에게 항명하고 팀을 이탈한 게 보도됐을 때, 구단의 조치는 감독을 경질하고 팀을 이탈한 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영전시키는 것이었다. 감독을 경질하면 팬들의 박수라도 받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섣부른 결정을 내린 구단은 엄청난 역풍을 맞았고, 김사니 감독대행은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비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진 사퇴했다.

배구는 높아진 시청률과 인기를 훈장처럼 자랑했지만, 인기가 많아질수록 감수하고 조심해야 하는 일도 늘어난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프로배구는 이미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무대 위로 끌려 나왔는데, 구단들은 여전히 무대 뒤 밀실에 숨어 있는 듯 행동하고 있다. 프로스포츠 구단의 존립 기반은 팬들의 사랑과 인정이다. 구단들은 프로배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태도와 자세를 갖추고 있는지를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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