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시민’ 관점의 필요성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문명과 시민’ 관점의 필요성

정치를 ‘문명과 시민’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지는 좀스럽고 치졸한 정치, 즉 진영으로 갈려 편견과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의 동 원에 의존하는 정치, 새해를 맞이해 그런 정치를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다 도달한 생각이다.

[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문명과 시민’ 관점의 필요성

안타깝게도 좀스럽고 치졸한 정치는 임인년 새해에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정책 쟁점보다는 가족 친지 주변 등의 스캔들이 주요 이슈가 된다. 지지율 교차가 일어나면서 경합이 치열해져 가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서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가득한 양대 세력 주도의 정치 지형을 볼 때, 또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유력 후보들의 ‘강성 퍼스낼리티(strongman)’와 리더십 -그리 이름 붙이기 어려운 후보도 있지만 - 특성 등을 볼 때, 대선이 끝나도 한국정치는 계속 소모적 갈등으로 점철될 공산이 크다는 데 있다.

그 정도가 심해졌지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고 할 수도 있다. 필자도 최근 좋아지면 얼마나 좋아질까라는 의구심에 빠져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놔두기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변화가 무척 근본적이고 치명적이다. 우리는 지금 소위 ‘문명전환기’라고 불리는 시대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우주개척시대가 열려 지구인이라는 인간의 본질이 변화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또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와 관계가 모호해지고 새로이 구성되고 있다. 애플TV가 제작한 최근 SF 영화 <핀치>에서처럼 기계(로봇)와 동물(반려견)이 지구 최후의 생명체가 되어 인간을 대체할 가능성을 점칠 수 있을 정도다. 기후위기는 또 어떤가. KBS가 신년에 실시한 조사에처럼 한국에서는 아직 전문가 수준에서만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 1위’로 꼽히지만 지구사회 전체 차원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최근 들어 슈퍼컴퓨터가 대형 산불과 홍수의 패턴을 읽지 못할 정도여서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어 있다. 그런데도 한국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최근의 대선 정치판을 보며 일갈한 것처럼 지구 차원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현 정부가 선도국가를 기치로 내걸었지만 한국의 지속성장에도 필요한 지구사회에 대한 주도성과 기여도를 높일 가능성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심대한 변화가 일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존의 문제가 지속 반복될 때는 관점을 새롭게 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의 발걸음을 멈출 수 있다. 문명과 시민의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다. 그렇다면 문명과 시민의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문명, 시민 모두 좋은 말이니 고상하고 우아하고 착하게 바라보자는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설사 그렇게 본다 해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불의 불명확 시대에
시민의 깨어 있음과
힘의 생성과 발휘는
균형상태일 때 가능하다

자치공동체 위해서 정치개념 확장

우선 문명의 의미를 짚어보자. 사전적 정의로 문명은 사회생활의 조직이 완성된 상태나 상황을 가리킨다. 즉 자기완결성을 지닌 사회질서를 뜻한다. 야만과 대비되는 문명의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문명의 이미지가 성장과 발전,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다. 하지만 문명을 꼭 그렇게만 보는 것은 오해다. 그리 보면 수많은 전쟁과 폭력과 정복과 지배와 학살과 인권 탄압 등으로 얼룩져 있는 인류문명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야만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근현대 문명의 두 축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도 이해할 수 없다. 문명은 결코 ‘달달한’ 개념이 아니다. 정치를 문명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의 진짜 의미는 ‘주체와 장소’의 성격에 있다. 문명(civilization)은 어원상 용어 자체가 ‘시민의(라틴어 civilis) -교양과 규범을 갖춘- 자치공동체(civility=community)’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치를 문명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특정 후보와 정당의 선거 승패에만 집착하지 말고 시민의 자치공동체의 형성과 유지와 발전을 기준으로 정치 개념을 재구성하고 확장하자는 것이다. 그럴 때 정치가 보통사람의, 보통사람에 의한, 보통사람을 위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시민 자치공동체의 원조 격인 도시국가 폴리스(polis)를 위한 삶과 실천이라는 뜻을 가진 정치(politics) 개념을 (근)미래관점에서 다시 복원하자는 것이기도 하다.

시민의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시민의 주도성과 힘을 내세운다.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는 옥중서신을 통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올해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깨어 있는 시민의 힘이 필요하다”는 신년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묻자. 깨어 있음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시민의 힘은 언제 생겨나고 발휘되는가? 깨어 있는 시민이란 말은 대체로 정의(justice)가 무엇인지, 누가 정의의 편인지를 가늠하는 고도의 의식, 즉 지성을 보유한 시민을 뜻한다. 그리고 그런 시민의 힘은 정치사회적 관심과 참여, 특히 대의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투표라는 주권 행사를 통해 정의로운 세력을 대표자로 선출할 때 생겨나고 발휘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옳은 소리다. 하지만 온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그런 인식과 담론은 현실 정치판에 정의의 편이 따로 있음을 전제하고 있기에 그렇다. 또 그보다 앞서 정치를 정의를 구현하는 ‘독수리 5형제의 전투’로 가정하고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 정치와 사회에서 홀로 존재하는 정의의 편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 대선의 특징을 많은 이들이 역대급 비호감 양대 정당 후보들에서 찾는다. 두 후보 모두 공적·사적으로 여러 의혹들에 휩싸여 있는 등 딱히 정의의 편도 불의의 편도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대권 후보들의 등장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가? 가장 큰 이유는 작금의 시대가 ‘그런 때’이기 때문일 수 있다. 국가형성-산업화-민주화 등의 거대변동을 이미 겪어 다양다기한 이해관계와 선호가 분출하는 사회에서 정의와 불의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 특히 그것이 작동하고 발현되는 원리와 방식에 있어 그렇다. 사람들의 처지와 생각과 삶이 그리 나눌 수 없게 촘촘히 연관·연결되어있다. 반586세대 정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정치사회 엘리트들의 오만과 독선과 독단을 지독히 싫어하고 미워하는 성향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대 상황에 맞지 않게 분명치 않은 것을 분명하다고 자신 있게 강변하는 이를 어찌 좋아하겠는가. 연장자의 (자기 딴에는) 소중한 역사적 경험에 바탕을 둔 훈계마저 배척하고 비아냥대는 ‘꼰대론’을 비롯한 각종 담론도 그런 시대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늘 자신을 비롯한 누군가의 분명한 옳음을 전제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지배하는 시대인 것이다.

정치권력 가진 자들에게
예속되지 않을 견제구는
힘 누구에게도 안 실어줘
정치세력과 시민 간에
균형 가져오는 방법

그러므로 이번 대선에선
그런 구상 가진 후보 찍되
여의치 않을 때에는
군소후보에 표를 던져
균형 이루는 게 현명하다

균형이 시민의 입지 넓히는 지름길

각기 홀로 옳음과 나쁨이 구현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과 순간과 사람이 있다고 여겨질 때가 있지만, 저간의 사정과 이면을 들여다보면 단순치가 않다. 온갖 것들이 서로 얽혀 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반독재 민주화 이행 초기에는 보다 선명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반민주적·반인권적 군부독재 질서를 계속 유지하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불의의 세력과 그것에 도전하는 정의의 세력이 정권세력과 야당·사회운동 세력으로 꽤나 분명히 갈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런 시대에 시민의 깨어 있음과 힘의 생성과 발휘는 ‘균형’ 상태일 때 가능하다. 제일 중요한 균형은 어느 일방으로 힘이 쏠리는 것을 제어하는 균형이다. 시민의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보자는 것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대다수가 먹고사느라 정치 정보와 지식을 챙겨 찾아보고 숙고하고 숙의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가 없는 데다,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어 자의 반 타의 반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형식상의 시민이다. 당연히 이런 상태를 개선해야겠으나 단시일 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정치권력을 가진 자 혹은 다가가는 자들에게 예속되지 않는 견제 방법은 어느 누구에게도 힘을 실어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시민들의 선택의 범위와 결과를 넓히고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 지지를 얻기 위해 시민의 말을 걸고 들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이기고 지느냐보다 승자와 패자 모두 긴장감을 유지한 채 시민들의 삶의 처지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인 것이다. 당장 자치를 구현하지는 못해도 정치세력 간에 그리고 정치세력과 시민 간에 힘의 균형을 가져오는 방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다가오는 대선에서는 시민의 자치공동체와 힘의 균형에 관한 구상과 비전을 갖고 있는 후보와 정치세력을 우선 찾아보고 선택하되, 여의치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표를 몰아주지 않는, 그래서 군소후보와 정당에 표를 던져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게 현명한 정치적 선택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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