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의 시간, 질문의 시간

김진우 정치부장

말도 참 얄밉게 한다. “한국의 민주화 역사상 가장 역겨운(distasteful) 선거”라니. 지난 13일 영국의 보수 일간지 더타임스 일요판이 한국 대통령 선거를 평가한 말이다.

김진우 정치부장

김진우 정치부장

이번 대선을 ‘역대급 비호감’이라고 하는 걸 그들 식으로 옮긴 모양인데, 표현이 더 얄궂다. 해외 언론의 평가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던 시절도 아니지만, 남의 잔치-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고들 하지 않나-에 감 내놓아라, 배 내놓아라 한다고 넘기기엔 께름칙하다. 해외 언론마저 주목하게 만든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 자기실현적 예언처럼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공식 선거운동 한 주를 채우기도 전에 이번 대통령 선거는 ‘비호감 대선’을 넘어 ‘해괴한 대선’으로 치닫고 있다. 한 대선 후보는 열차에서 맞은편 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올려놓았다가 논란이 일자 “장시간 이동으로 인한 경련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그러고는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상대 당 대선 후보의 과거 사진으로 반격한다. ‘동물 지지’를 두고 야당 대표와 여당 의원 간 논쟁이 펼쳐진다. ‘소가죽 굿판’ 의혹이 나오고, ‘기생충 가족’ ‘까도비(까도까도 비리만 나오는) 후보’ 등 막말이 동원된다.

두 후보 모두 ‘통합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지만,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은 그 반대다. 거대 양당과 후보들은 분노와 배제,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는 선거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상대를 용납할 수 없는 적으로 보고, 악마화도 서슴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은 엽기 굿판과 신천지 의혹을 끌어들여 주술 프레임으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공격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는 “최모(최순실)씨는 점은 좀 쳤는지 모르겠지만 주술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주술에 국정이 휘둘리면 되겠나”라고 말했다. 윤석열 후보는 여권을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에 빗댔다. 그는 “자기 죄는 덮고 남은 짓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서 선동하고, 이게 원래 파시스트들,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수법”이라고 공격했다. 양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다음 대통령은 이변이 없는 한 ‘주술사 대통령’ 아니면 ‘파시스트 대통령’이 된다는 얘기다.

후보들의 비호감 경쟁에, 진영 대결에 기반한 네거티브 공방에 이번 대선의 시대적 의미를 따지고 향후 5년간 국정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제시하는 과정은 묻혔다. 다시 해외 언론이다. “국내로는 소득과 성 불평등을 둘러싼 분쟁이 심화하고 국외로는 한국의 문화적·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가운데 북한과 중국, 미국, 일본과의 관계에서 미래를 형성해야 하는 중요한 선거”(워싱턴포스트), “북한의 안보 위협, 부동산 문제 등 심대한 위기현안에 대한 논쟁도 없다”(더타임스).

적어도 이번 대선에 대해 우리가 동의하는 게 있다. 이번 대선이 코로나19 이후 대전환기에 대한민국호를 이끌어갈 선장을 뽑는 시대적 의미를 띤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 하나하나가 웬만한 노력으로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재난이 빈부의 깊은 골을 타고 찾아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각자도생을 강요받고 있는 서민들의 일상적인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기후위기, 에너지와 식량 위기, 세계 경제의 침체 조짐 등 엄청난 파고들이 밀려오고 있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는 훨씬 복합적이고 심대하다.

이런 눈앞의 현실과 곧 다가올 미래를 함께 바라보면서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정신이나 비전 논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상대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와 증오다. 대전환의 시대, 뉴노멀의 시대에 필요한 정책·비전은 보이지 않고, 선심성 공약이 난무하고 있다.

“정말 건드려야 될 큰 문제는 안 건드리고 개별적인 문제들만 가지고 씨름하는 것 같다. 시대는 어마어마한 전환기에 들어가고 있다고 그러는데, 이 시기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은 어마어마한 전환기를 준비해야 될 첫 번째 대통령일 텐데 그 무게를 거의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걱정이다.” 중도보수 성향의 노(老)정객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대선 이후가 걱정이라는 말이 나온다. 책임은 후보·정당만이 아니라 유권자에게도 있다. 그러니 투표일까지 계속 질문해야 한다. 상대방이 ‘나쁜 X’라는 주장은 알겠고, 당신은 뭘 할 거냐고. 우리는 당선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변화가 보고 싶은 거라고. 그 때문에 한 표를 행사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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