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이라는 스포일러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인간사회는 평등하지 않다. 동물의 세계도 그렇지만, 그 불평등은 대개 유전적 요인으로 결정된다. 인간사회는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면서 유전적 요인에 더해 제도적으로도 불평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다. 유전적 불평등은 종족 번식과 진화를 위해 자연이 하는 일이니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다. 미남미녀에게 세금을 더 물리자는 얘기도 있으나 모두가 동의하는 기준을 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하지만 권투 시합을 체급별로 치르듯이 유전적 불평등을 감안한 사회제도를 만들 수는 있다. 더욱이 사유재산 세습으로 인한 불평등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낸 불평등이므로 제도적으로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은 권투경기 수준의 보완책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다. 유전적 불평등에 더해 세습으로 인한 불평등까지 더해지면서 인간사회는 사실상 반칙을 용인하는 사회가 되었다.

불평등한 관계에서 약자의 반칙은 어느 정도 용인되기도 한다. 불합리한 규칙에 대항하여 이를 어기는 행위는 실정법상으로는 반칙이지만, 자연법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정의를 구현하는 행위일 수 있다. 홍길동이나 로빈 후드 같은 반칙왕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것은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반칙이 판치는 세상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역반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세상에서는 강자가 공공연히 반칙을 하고, 심판도 강자 편을 들기 일쑤다. 약자의 통쾌한 반격은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계속 얻어맞다 링 밖으로 실려 나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불공평한 게임을 보완하는 장치가 교육제도인 것 같지만, 실제로 교육판의 룰도 불공평하기는 매일반이다. 격변하는 사회에서는 교육이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안정기에 접어들수록 교육은 계급재생산의 확실한 통로가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교육이 불평등을 완화해주기보다 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교육현장은 일찍부터 반칙에 대한 무감각을 훈련하는 곳이 되다시피 했다. 아이들 힘으로 할 수 없는 숙제를 내고 그걸 검사하는 것도 반칙을 조장하는 것이다.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아이는 좌절감을 맛보고, 엄마 도움으로 숙제를 하고는 자기가 한 양 시치미를 떼는 아이는 뻔뻔함을 기른다. 학원에서 하는 선행학습이 사실상 반칙 행위라는 것을 아이들도 부모도 교사도 깨닫지 못한다. 너도나도 하기에 안 하는 사람이 바보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다.

학원의 역할은 학생들의 내신 성적을 보장하는 것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데는 한 달 남짓이면 되므로 나머지 기간에도 수강생을 끌어들일 상품으로 개발된 것이 선행학습이다. 다음 학기에 배울 내용을 방학 때 미리 떼주던 수준에서 나아가 1년, 2년 앞당겨 교육하는 풍조가 학원들 사이에 경쟁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차별화된 상품이 필요해지면서 일종의 고급화 전략으로 심지어 11년짜리 선행학습 영어 상품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아이들은 ‘선행’하면, 선행(善行)보다 선행(先行)학습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독일 사회에서 선행학습을 범죄시하는 것은 그것이 시민사회의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선행학습 붐은 마치 영화관에서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기 시작하자 뒷줄에 앉은 사람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일어서서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하다. 쓸데없이 모두가 피곤해질 따름이다. 게다가 교실은 뒷자리가 더 높지도 않다.

선행학습과 예습은 다르다. 예습이 영화를 보기 전에 기본 정보를 조사하는 것이라면 선행학습은 줄거리와 결말을 미리 듣는 것과 같다.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이 흔히 학교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는 것은 스포일러를 접하고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 옆 사람에게 결말을 흘리는 것과 비슷하다.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것을 ‘망치는 사람’이란 뜻의 ‘스포일러’라 부르는 까닭은 그런 행위가 관객의 흥을 깨고 결과적으로 영화도 망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행학습은 학습자의 흥미를 떨어트리고 교육을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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