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 표시 지우면 안 될까요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얼마 전 일이다. 아침부터 콧물이 나더니 저녁 무렵에는 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서둘러 근처 선별진료소를 찾아갔고 신속항원검사 창구로 안내받았다. 검사신청서에 이름, 연락처, 주민등록번호 등을 적어 내려가던 중 성별란에서 펜이 멈췄다. 짧게 고민했으나 빨리 검사받는 것이 중요하니 그냥 법적 성별인 ‘남’에 체크했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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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서와 함께 신분증을 건네자 예상했지만 익숙한 반응이 다가왔다. 신청서와 신분증을 확인하고, 내 얼굴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신분증을 확인. 성별정정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며 수없이 겪었던 일이기에 나의 대응도 정해져 있다.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있기. 본인인지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할 준비하기. 다행이라 해야 할지 신원을 재차 확인받는 일은 없었다. 검사 후 받은 음성확인서에는 역시 성별 ‘남’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도하는 마음으로 선별검사소를 떠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성별에 따라 검사방식이 다른 것도 아닌데 왜 성별을 검사받아야 할까.

지난달 27일 1주기 기일이었던 변희수 하사의 강제전역처분 취소 재판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법원에서는 방청인들에게 선착순으로 방청권을 배부했는데 신청 양식에 성별을 적어야 하는 것이었다. 재판의 특성상 많은 트랜스젠더가 방청을 희망하는 상황이었기에, 단체들에서 법원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법원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성별을 확인할 필요성을 설명하는 일 없이 즉시 성별란이 삭제되었다. 애초에 넣을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냥, 관행적으로 성별란이 들어갔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재판 방청과 코로나19 검사 외에도 일일이 성별을 드러내고 검사받을 필요가 없는 일상업무는 많다. 그럼에도 주민등록번호 7번째 자리로 성별이 드러나는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신원 확인이 필요한 업무마다 어려움을 겪는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신분증을 제시하는 업무를 포기한 경험을 물었을 때, 21.5%가 병원 이용을 포기한 적 있다고 답하였다. 약 15%는 보험 가입과 은행 방문을, 9.2%는 전화와 인터넷 가입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일상업무의 포기는 일차적으로는 주민등록번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가입, 신청 관련 서류에 관행적으로 들어가 있는 성별란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별 표시로 인해 트랜스젠더가 어려움을 겪는 활동이 또 하나 있다. 투표이다. 사전투표 시에는 신분증에 표시된 주민등록번호가, 본 투표 시에는 여기에 더해 성별이 명시된 선거인명부가 부담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국가인권위 조사에서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 경험을 물었을 때, 9%가 신분증 확인으로 법적 성별이 드러나거나 현장에서 주목받는 것이 무서워서 투표를 포기했다고 응답했다. 소수자에 대한 공약을 찾기 어려운 이번 대선에서 많은 이들이 기표 직전까지도 무거운 마음일 것으로 예상된다. 적어도 투표소에 가는 발걸음은 편안해야 하건만, 여전히 누군가는 투표소를 방문하는 것 자체에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2020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투표장에서 성별 확인 시 차별이 없도록 유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타당한 요청이라 할 것이지만 근본적 해결방안은 안 된다 할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적인 신분증 및 서류 등에서 가능한 한 성별 표시를 지우는 것이다. 극단적이라고 생각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2025년쯤부터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계획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단계적으로라도 이를 실시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냥, 관행적으로 들어간 성별 표시를 지우면서 누군가가 겪을 차별을 해소하는 것. 대선 이후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으로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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