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로저스는 꿈도 못 꾸는 일

이재덕 뉴콘텐츠팀 기자

“농업이 미래다. 농업에 투자하라.” 월가의 투자자 짐 로저스의 말이다. 앞으로 곡물 등 농산물 가격은 계속 뛰게 될 것이고 투자 수익률도 높을 거란다. 현명한 농부들은 람보르기니를 몰게 될 거라면서 자신이 한국의 청년이라면 농부가 되겠다고도 했다. 선물시장에서 돈의 흐름을 좇으며 고수익을 내는 사람의 말이니 권위가 실린다. 짐 로저스의 말은 농업·농촌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강연에서 자주 소환되는데, 며칠 전 서울에서 열린 정책 토론회 자리에서도 이 말이 나왔다. 농업 관련 기술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는 빌 게이츠의 사례도 단골 메뉴다. ‘아프리카 기아를 막겠다’면서 유전자조작농산물(GMO) 기술 개발에도 돈을 댄다. 그는 미국에서 경기도 전체 면적보다도 넓은 경작지를 사들인 농지 부자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그들이 말하는 농업의 미래가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투자라는 말보다 투기라는 말을 써야 하는 건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재덕 뉴콘텐츠팀 기자

이재덕 뉴콘텐츠팀 기자

사실 우리 농업은 일찌감치 투자 과잉 상태였다. 농산물 개방 시대를 맞아 농업 체력을 키워야 한다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대농 위주의 정책을 펴왔다. 박근혜 정부 당시 농림축산식품부 담당 기자였던 내게 한 고위 공무원은 “농사도 돈이 되는 시대”라며 “돈에 허덕이는 가난한 농부들 말고, 벤츠를 모는 억대 농부들을 기획기사로 다뤄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지금도 농식품부는 귀농한 청년들에게 시설 투자를 제안하면서 낮은 금리로 3억원을 빌려줄 테니 5년 거치 기간 후 10년 동안 갚으라는 정책(청년창업농 사업)을 펴고 있다. 우리나라 농가의 농업소득은 수년째 연 1000만원 언저리인데 이제 막 귀농해 시설에 투자한 청년 농부들이 6년차 이후 이 돈을 갚아나갈 수 있을까.

로저스 수익만 좇지 농촌미래 안 봐

식량안보를 위해서는 한국판 카길(세계 1위 곡물메이저)이 있어야 한다면서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 민간 대기업과 합작해 설립한 aT그레인컴퍼니는 3년도 못 가 문을 닫았다. 이후 포스코인터내셔널이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미콜라이우에서 곡물터미널을 운영하며 우크라이나의 밀과 옥수수를 국내에 들여오기 시작했지만, 몇주 전부터 이 도시는 러시아군의 폭격을 받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도 한국 기업들이 ‘식량안보’ 명분으로 진출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생산한 농산물을 국내 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권마다 농업에 예산을 투입해 20% 수준인 곡물자급률을 높이겠다고 공언했지만 계획뿐이었다. 스타 농부, 억대 농부, 대기업 키우기에 투자된 농업 예산의 일부나마 중소농들을 보듬는 데 쓰였으면 어땠을까.

“농사도 힘들지만, 그보다 농민이 외면받는 현실이 더 견디기 힘들다.” 전북의 장수사과 재배 농민의 말이다. 농산물 강국들과 ‘메가 FTA’를 체결하면 그동안 병충해 유입 등을 이유로 수입되지 않았던 외국산 사과나 배 등이 수입될 가능성이 크지만 자동차, 철강, 부품 따위의 수출 기대감에 수입 농산물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묻힌 지 오래다. 농산물 개방이 시작됐던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농업·농촌 정책이 이렇게 변함없이 일관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들의 삶에는 무관심했던 나 같은 도시 소비자들이 그 정책의 수혜자이자 공범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 로저스는 수익만 좇을 뿐, 농촌이나 먹거리의 미래를 보지 않는다. 투자라는 이름으로 진행 중인 많은 일들이 그렇다. 목소리 없는 이들의 희생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일에 몰두할 뿐, 수익을 공유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러니 이제는 농업에 투자 말고, 애정을 주었으면 좋겠다. 도시 소비자들이 농부 한 명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가 그동안 감내해온 희생 덕분에 나의 삶이 가능했다는 불편한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농업투자 과잉…이젠 애정을 주자

최근 충남 당진에서 화훼 농사를 하는 청년 농부의 유기농 프리지어 꽃을 주문해 집 안을 꾸몄다. 지난해 초가을 장마 때 허브와 꽃이 자라던 그의 비닐하우스는 물난리를 겪었다. 이 농부를 응원하겠다며 300명이 넘는 소비자 후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복구 비용을 댔다. 정직하게 농사짓는 농부에 대한 고마움에서 나온 응원들이다. 도대체 어떤 농부인지 궁금해 그가 키운 꽃을 주문했다. 서울에서 친구가 될 농부를 찾기 어렵다면 혜화동, 성수동, 서교동 등지에서 열리는 농부시장, 채소시장이라도 가보자. 짐 로저스나 빌 게이츠, 그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꿈도 못 꿀 농업의 미래를 그리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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