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반영하기보다 거스르는 책을 원한다

정희진 여성학자
[정희진의 낯선 사이] 시대를 반영하기보다 거스르는 책을 원한다

거대 양당이 비슷하다지만 정권이 바뀌면 달라지는 사안도 많다. 출판 관련 일도 그중 하나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방부, 여성가족부, 교육 관련 부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권장 도서 목록이 있는데, 선정 위원 교체는 중요한 정치다. 이들의 안목에 따라 사병들이 내무반에서 읽는 책, 중·고등학교, 대학, 지역 도서관의 서고가 달라질 수 있다. 정권교체가 아니더라도 책은 시류에 민감하다. 자기 계발서의 범람,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여성학 고전의 재출간 붐,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효과였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200만부 판매…. 책은 당대를 반영한다.

정희진 여성학자

정희진 여성학자

문제는 “반영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모든 언어가 현실보다 늦게 당도한다 해도 책은 반영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야 한다. “새로운 기업 문화를 선도하겠습니다”라는 구호는 출판사에 가장 어울린다. 유권자의 의식이 대통령을 선택한다.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책이 팔리고 읽히는가는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된다.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가 되는가는 그 사회의 관심사와 수준을 보여준다. 의료, 교육, 교통, 환경, 노동… 모든 분야가 우리 자신의 인식에 따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출판계 지인에게 이런 장황설을 늘어놓으며 문체부 장관 후보 걱정을 했더니, “물정을 모르는 네가 더 걱정”이라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책이 보여야 팔릴 거 아니니? 온라인 서점 MD의 판단에 따라 출판사 하나가 날아가는 세상이야. 특히 인문학 MD는 더 그래. ○○도 매출이 반 토막 났다더라.” 정치보다 시장이 더 큰 권력이라는 현실을 나는 왜 자꾸 잊을까. 이제 검열은 국가가 아니라 독자가 한다. 오히려 국가의 탄압을 받으면 더 잘 팔린다.

지난 겨울, 계간지 ‘실천문학’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이번 해 봄호 특집으로 한국 사회의 차별 문제 중 성차별에 관해 써달라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실천문학’이 나온단 말이어요?”라고, 말할 뻔했다. 안 쓸 아니 못쓸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신선하게 쓰기 어려운 주제,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내 생애 가장 적은 원고료, 당시 여러 군데에서 글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던 나의 뇌는 거의 골다공(骨多孔) 상태였다.

‘실천문학’과 어느 주간지

‘실천문학’은 1980년 3월, 많은 이들의 노력과 의지로 창간되었다. 이때가 어떤 시절이었겠는가. 당시 ‘실천문학’은 문학지가 ‘아니었다’. 매일의 교과서였다. 나도 20대에 끼고 살았던 책이다. 물론 지금 ‘실천문학’의 위상이나 내용은 그렇지 않다. 나와 같은 독자를 포함하여 ‘실천’이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는 내 알 바 아닌 세상이다.

어쨌든 나는 쓴다고 했고 졸고지만 썼다. 책은 상품이되 전형적인 상품일 수는 없다. 나는 저임의 고료로 ‘실천문학’에 글을 씀으로써 자본과 싸운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허위요, 망상이다. 막상 완성된 책을 받아보니 ‘실천문학’은 진보하고 있었다. 권두언을 쓴 편집장 소설가 이순원의 글과 실린 작품들 모두 단단하고 겸손했다. 특히 권두언은 대한민국의 모든 ‘작가’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습작 때처럼 글을 쓰자, 작가는 좋은 글을 쓰면 된다. 글이 안 되니, 몰려다니고 SNS 하고 관공서 들락거리고 자꾸 매체에 나온다”는 것이다.

‘실천문학’은 여전히 실천적이었다. 1980년대는 그때대로, 지금은 시장이라는 세고 거침없는 무서운 물결에 떠밀리지 않고 존재하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실천문학’의 존재 자체가 저항이다. 얼마 전 ‘녹색평론’은 운영난으로 잠시 휴간했는데, 여전히 내 마음은 쓰리고 쓰리다. 시장 논리에서 이런 매체들은 생존 불가능하므로 우리에게는 다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새로운 ‘실천문학’에 대한 복잡한 감동이 밀려들 무렵, 이른바 진보 주간지에서 내게 제안이 왔다. ‘당대의 글쟁이’를 선정, 인터뷰를 하는데 나도 그중 한 사람이란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첫째, 이런 기획에 동의하지 않는다. 선정된 이들은 글을 잘 쓰는 이들인가, 유명한 이들인가? 전자라면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둘째, 오히려 안 알려졌지만 좋은 글쓴이를 발굴해야 하지 않을까? 셋째, 선정된 이들은 누가 봐도 그 매체와 인연이 많은 이들이다. 실제로 이 기획은 소설가를 시작으로 한 이른바 시즌2였다. 출판계에서도 필자, 출판사, 선정 매체 사이의 ‘이해관계’를 두고 말이 많았다고 한다. 넷째, 나는 왜 선정되었나. 다섯째, 네 번째와 연결되어 선정된 이들이 일하는 분야는 모두 다른데 이들을 같이 다룰 수 있는가. 여섯째…. 내가 거절한 이유는 열 가지가 넘었다.

언어가 축적되는 사회를 위해

이곳도 사회생활이 중요하다. 나는 네트워크가 없다. 그런 주제에 이런 행동은 자해다. 내 주장이 다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이런 발상을 참을 수 없었다. 모두가 작가인 시대는 곧 분야와 필력을 불문하고 모든 이가 판매 경쟁을 하거나 글보다 독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의미한다. <오징어 게임>의 독자가 있고, ‘홍상수’의 독자가 있고 둘 다 즐기는 독자가 있다. 이를 구분하지 않고 소설과 비소설 분야로만 나누어, 글쓰는 이들을 정글에 밀어넣는 기획이다.

이런 시대에 ‘진보 언론’이 출판문화에 기여하고 싶다면, 책들의 다양성과 독특성을 취재하면 된다. 그 주간지의 사정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새로운 발상은커녕 ‘진보 인문학 시장’을 놓고 이미 상업적으로 입증된, 심지어 자주 출몰하여 식상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을 “이 시대의 작가”라고 선전하는 기획은 안이하다.

실상 가장 큰 좌절은 나의 제안- 안 알려졌지만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을 발굴 -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 기획은 몇 년 전 어느 온라인 출판사에서 시도한 적이 있는데, 선정된 이들이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 유명 인사였다. 발굴이 의미가 없을 만큼, 한국 사회는 작가 인력풀이 적으니 모두 같은 물속에서 풍덩거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교육열만 높다. 이로 인해 부모와 아이들의 인생이 저당 잡힌 사회다. 대선 당시 ‘1일 1사건’의 주인공처럼, 학력(學力)은 학력(學歷)과 일치하지 않거나 반비례한다. 국내외적으로 “한국인들은 인문학의 저변이 넓고, 대학의 학문 수준이 높으며, 문해력이 높고, 논쟁이 발달한 사회”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 스스로도 차마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공론이 형성될 전제(지식 형성)가 안 된 사회다. 여성가족부 존폐든 재구성이든 논의를 하려면, 젠더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남녀를 불문하고 그것을 아는 인구가 거의 없다. 이는 차별 감수성 문제가 아니라 그냥 무지다.

한편 한국은 학벌 카스트의 나라다. 미국 박사, 국내 박사, 어느 대학, 대졸 아님… 이러한 악폐에는 저항하지 못하고 선망과 부조리를 일삼으면서, 정작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래서 본인이 모르는 말을 타인이 사용하면 알아가면 될 것을 “왜 내가 모르는 말을 쓰냐”고 항의한다. 권력은 듣는 사람(독자)에게 있기 때문에, 말하는 사람(필자)은 이러한 상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책의 정가가 1만원이면 저자 몫의 인세는 10%, 1000원이다(번역자는 4~6%). 세금을 떼면, 저자에게 주어지는 돈은 1000원이 안 된다. 1000권을 팔아도 저자는 100만원을 벌지 못한다.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3000부가 팔려 ‘대박’이 났다고 치자. 그래도 필자가 받는 돈은 500만원이 안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문제는 책 한 권을 쓰는 과정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페이스북을 긁는 이들도 있고, 몇십년 공부를 한 사람도 있다. 누가 힘들여 공부를 하겠는가. 누가 독창적인 사고를 모색하고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를 쓰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 사회가 좋아하는 ‘K콘텐츠’도 개발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시대다. 쓰는 개인은 모두가 작가다. 사회적 약자의 서사가 드러나는 바람직한 면도 있지만 지금처럼 개인의 경험이 바로 활자화되는, 즉 해석되지 않은 자기 이야기가 범람할 때, 작가는 양성되지 않고 언어도 축적되지 않는다. 루쉰이 위로한다. “먹으로 쓴 허언은 피로 쓴 사실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글은 결국 먹으로 쓰는 것이다. 피로 쓴 것은 혈흔에 지나지 않는다. 색이 변하기 쉬우며 사라지기 쉽다.”


Today`s HOT
휴전 수용 소식에 박수 치는 로잔대 학생들 침수된 아레나 두 그레미우 경기장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해리슨 튤립 축제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