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핵보유 국가들끼리 재래식 무기로 싸울 경우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전쟁을 끝까지 치를 수 있을 것인가는 국제정치학계의 오랜 연구주제 중 하나이다. 이제는 핵보유국이 핵비보유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로 논쟁이 옮겨가고 있다. ‘21세기 히틀러’ 블라디미르 푸틴이 보여주듯 근본적 국가이익이 심각할 정도로 훼손당했거나 훼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핵무기 사용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가설이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미국 역시 6·25 전쟁을 포함해서 국지적 분쟁에서는 핵을 먼저 사용할 수 있다는 정책을 펼친 적이 있다. 1975년 4월30일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그해 6월 제임스 슐레진저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경우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도 한반도를 비롯해 분쟁지역에서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그때만 해도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던 시기였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 주도 데탕트 조류의 영향으로 남북한 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됐다. 자연히 한국에 배치됐던 수백기의 전술핵들도 순차적으로 빠져나갔다. 드디어 한반도에 핵 없는 봄이 오는가 싶었다.

1959년 영변의 구룡강가에 가구공장으로 위장간판을 내걸고 몰래 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 북한은 현재 일곱 번째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따라서 비핵화공동선언은 오래전 불타고 없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북한군 창설 90주년 열병식 연설에서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5년 전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서 그 다음해 “우리 국가에 대한 핵위협이나 핵도발이 없는 한 핵무기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던 입장에서 180도 선회했다. 이렇듯 핵실험 재개 시사와 계속되는 미사일 실험발사는 불길하다.

이러한 위기 국면 속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금주 방한,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첫 대면을 한다. 윤 대통령 취임 후 11일 만에 갖는 한·미 정상회담이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과의 첫 만남으로 한국을 먼저 방문한 첫 사례는 1952년 12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의 참상을 목격하고 돌아갔던 때였다.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하고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자신의 공약대로 7월에 휴전이 됐다.

그로부터 40년 후 1993년 7월 빌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을 찾아 그해 2월에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과 첫 회담을 가졌다. 북한의 핵비확산조약 탈퇴 선언(1993·3·12) 이후 서울 불바다 발언, 미국의 영변 폭격설,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방북 등으로 1차 북핵 위기가 최고조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알려진 대로 카터 전 대통령이 소방수 역할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방한 중 전임 대통령과도 회동한다. 이례적이다. 바이든으로서는 가뭇없게 사라져 버린 북한비핵화와 김정은에 관해 문재인 전 대통령으로부터 여러가지 경청할 이야기가 많을 것으로 판단했을 수 있다. 문 전 대통령이야말로 김정은과 나눈 판문점 도보다리 이야기를 비언(飛言)과 췌언(贅言) 형태가 아닌 고갱이를 전달해 줄 유일한 인물이 아닌가.

마침 신임 통일부 장관이 청문회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 시 모니터링이 지원의 전제 조건이 돼선 안 된다는 유연한 입장을 밝힌 지 하루 만에 북한은 코로나19 발생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 어젠다인 대북정책에서는 이어령 선생의 탁견처럼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봄이 온다’고 믿는 측근들의 숫자가 많아지길 기대한다. 북한비핵화 협상은 중단이 아니라 계속 변주해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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