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이 쪼개지면 벌어지는 일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지적장애가 심한 여성이 있었다. 집과 특수학교만 쳇바퀴처럼 돌다가 성인이 되면서 집에만 머물게 된 이 여성의 유일한 낙은 스마트폰이었다. 인터넷 광고를 타고 들어간 채팅 앱에서 수많은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그중 한 남성 A는 선물을 준비했으니 만나달라고 연락을 해왔다. 모르는 사람이 왜 선물을 주겠다는 것인지 지적장애로 인해 그 맥락을 이해할 겨를이 없었지만, A는 계속 만나자고 졸랐다. 그렇게 처음 대면한 날, 여성은 모텔로 유인되어 성적 침해행위를 당한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는 피해자를 사과하는 척 달랜 A는 ‘갈 때 가더라도 근처 자기 집에서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라’고 다시 여성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들어가게 된 A의 집에는 그의 친구 남성 B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A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자리를 피해주었다. 여성은 B에게 두 번째 성적 침해행위를 당했다. 모두 같은 날 불과 몇 시간 안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문제는 사건의 내용이 아니라 그 이후 사건의 처리 과정이다. 여성의 가족은 뒤늦게 이 일을 알고 경찰서에 고소장을 냈지만, 며칠 뒤 담당 경찰이라며 ‘진정서로 다시 써달라’라는 연락을 받았다. 고소사건보다 인지사건(진정이나 신고로 수사가 시작되는 사건)으로 처리하는 것이 경찰의 근무 평정에 더 유리하지만, 정작 고소인의 권리(불기소처분에 대한 항고권 등)는 없어진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별생각 없이 진정서를 새로 써서 제출했다.

몇 개월간 사건은 함흥차사였다. 경찰은 피해자가 A에게 당한 일을 ‘불송치’했다. 같이 모텔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에 이 지적장애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A의 행동은 아예 검찰에 송치되지 않았다. B의 행동은 범죄라고 보긴 했지만, B의 주소지가 바로 옆 도시로 되어 있다는 이유로 B 부분 사건은 ‘이송’되었다.

사건 처리 이후에도 피해자는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 한참 후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보니, A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B에 대해서만 저 멀리 있는 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민주당이 2019년 패스트트랙을 통해 밀어붙인 ‘1차 검경 수사권조정’은 별다른 이유 없이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없애고, 경찰에 ‘수사종결권’을 주었다. 수사권조정 전에는 모든 사건이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되었지만, 2021년 수사권조정 시행 이후에는 경찰이 보기에 ‘범죄의 혐의가 있어 보이는 사건’만 검찰에 송치된다. 경찰은 ‘불송치결정’을 통해 사건을 종결할 수 있고, 이 불송치결정에 이의 있는 사람이 별도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이의신청서’를 작성해 경찰에 제출해야만 그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다.

만약 이 여성이 수사권조정 전에 같은 피해를 입었다면, 경찰은 ‘A는 혐의 없음 의견, B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전체 기록을 송치해야 했다. 그러나 수사권조정 이후 검찰은 B의 행동만 송치받기 때문에 A와 B가 어떻게 범죄를 공모했는지, 지적장애 여성인 피해자가 정말 A에게 선뜻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이 맞는지 더 들여다볼 수 없다. 피해자 측이 뒤늦게 A의 사건 불송치결정에 대하여 이의신청을 했지만, 검찰에서 A와 B의 공모관계를 입증하여 특수강간으로 기소하고 싶어도 이미 불가능하다. 사건이 쪼개지면서 범죄자들만 살판나고 있다.

고소사건이 진정사건으로 함부로 바뀌는지 살피는 길, 피해자가 사건 진행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길, 사건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며 부족한 부분을 충실히 보완할 수 있는 길은 ‘수사지휘(수사통제)’이다. 수사지휘는 검찰제도의 탄생 이유이기도 하다. 수사권을 통제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충실히 보장하기 위하여, 더 늦기 전에 검찰의 ‘수사지휘’를 법으로 복원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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