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 그 새로운 시작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하안거(夏安居)가 시작됐다. 이때가 되면, 대다수 스님은 일제히 집중 수행을 시작한다. 마치 흩어졌던 구름이 다시 뭉치듯 스님들도 전국 방방곡곡의 수행처로 몰려든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스님들이 사찰에서 참선만 하는 줄 알지만, 스님들은 소속된 수행처에 따라 수행의 내용이 달라진다. 예를 들자면, 선원에 있는 스님들은 참선하면서 안거를 보내고, 승가대학(강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토론한다. 그리고 율원에서는 수행자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지켜야 하는 계율에 대해 익히고 연구하고, 염불원에서는 의례를 집전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해 실습하고 연구한다. 이 모든 수행기관이 한곳에 모여 있는 사찰을 ‘총림(叢林)’이라고 부른다. 마치 갖가지 나무들이 빽빽이 모여서 커다란 숲을 이루듯, 다양한 배경의 스님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여름 한철을 보내게 된다. 안거의 시작을 결제(結制)라고 하고 마치는 것을 해제(解制)라고 한다. 수행의 끈을 묶었다가 푸는 것과 같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그렇다고 스님들이 안거철에만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안거가 끝나고 다음 안거까지의 공백기를 ‘산(散)철’이라고 하는데, 만행을 하거나 단기간의 ‘산철 결제’를 하기도 한다. 짧은 공백도 수행하는 시간으로 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수행에 결제철과 산철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결제 기간을 두는 이유는 수행에 마디를 만들고 매듭을 지어서, 보다 밀도 있는 집중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한국불교는 고유의 ‘안거’ 전통을 오랫동안 지켜오고 있다. ‘안거’란 불교 수행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수행하는 전통 혹은 기간을 뜻한다. 일 년 중 여름과 겨울 각 석 달을 하안거, 동안거로 이름하여 수행한다. 원래 안거는 인도에서 수행자들이 여름에 탁발하는 와중에 벌레 같은 미물들을 살생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한곳에 모여서 외출하지 않고 수행에만 집중하도록 한 제도이다. 이 전통이 25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안거는 하안거대로 동안거는 동안거대로 힘들지만 동시에 멋과 운치가 있다. 지금은 오월이라서 참선하든 경전을 보든 뭘 해도 좋은 날씨이지만 더위가 닥쳐오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체력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결제 초기의 비장했던 각오와 결심은 점점 희미해지면서 사라져간다. 특히 필자가 소속된 승가대학(강원)의 경우, 출가한 지 5년 미만의 초심자들이 대부분이라서 익숙하지 않은 일상과 수행을 몸에 익히느라 애를 먹곤 한다.

안거가 시작되는 결제날이 되면, 이제 막 출가한 어린 10대의 사미승들부터 이미 승가에서 평생을 수행하신 큰스님들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느낀다. 비장함마저 들 정도이다. 방장 스님의 결제 법어를 시작으로 스님들은 수행처별로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간다. 그 결제가 시작될 무렵 특유의 도량 분위기는 절로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아마도 수행자들 각자의 마음에서 다지는 공부에 대한 결의가 모여서 만든 에너지일 듯싶다. 특히 안거의 상징과도 같은 발우공양이 시작되면 비로소 안거가 시작되었음을 몸으로 느낀다. 발우는 안거에 참여한 모든 대중 스님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죽비소리에 맞춰 의례에 따라 진행한다. 이때, 맞은편에 앉아 있는 어린 학인 스님들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나의 승가대학 시절이 겹쳐진다. 앉아 있는 자세조차도 힘들어 보이는데, 시종일관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을 애써 지어가며 앉아 있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다. 그런 감상에 잠길 때쯤이면, 나도 어느새 공동체의 중진이 되어 있다. 세월은 그렇게 지나간다. 가야산도 해인사도 1200여년 전 모습 그대로인데, 사람들만 계속 바뀌어 간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지루한 장마와 무더위와 씨름하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느껴질 때쯤이면 해제날을 맞이한다. 한 번의 안거를 마치면 훌쩍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름 잘 마무리했다는 안도감과 해냈다는 뿌듯함이 함께한다.

어린 소년이 출가하여 어엿한 장년이 되고 소임을 맡아 공동체를 이끌어가듯, 시간은 무상하지만 안거를 통해 그 속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자신 또한 변화하고 성장해간다. 매년 안거가 거듭되고 같은 일상이 반복되지만, 그렇게 과거는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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