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에 대한 섬김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내 대학 시절 해방신학은 낡아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섬김은 유지

이젠 사회도 대학도 오래전 개종
학생이 가난한 자를 고발하는 등
대학도 세상이 섬기는 신을 섬겨

그 시절 대학은 많은 게 뒤집힌 곳이었다. 신입생으로 두 달을 보낸 5월 어느 날 갑자기 기온이 쑥 올라갔다. 체감으로는 한여름 같았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들었는데도 나는 긴 옷을 입었다. 서울살이를 시작할 때 고향집에서 여름옷까지 챙겨오지 않아 입을 옷이 없었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학생회관 근처에는 언제나 이런저런 기금 마련을 위해 티셔츠를 판매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그런데 그날은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학생회실이나 동아리방에 하나쯤 굴러다니던 반팔셔츠도 그날은 눈에 띄지 않았다. 별수 없이 학교 기념품 매장으로 가서 저렴한 걸로 하나 골랐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셔츠 앞면에 학교 로고가 너무 크게 박혀 있었다. 부끄러웠다. 입학 전에는 그 로고가 찍힌 볼펜이나 노트를 자랑하듯 선물했는데, 불과 두 달 만에 그걸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결국 화장실에 들어가 셔츠를 뒤집어 입었다. 그날 이후 바깥에서 그 옷을 입는 일은 없었다. 집에서 허드렛일할 때나 몇 번 걸쳐 입었을 뿐이다. 요즘은 ‘꽈잠’이라고 해서 학교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자랑삼아 입는다는데 그때는 그것이 부끄러웠다.

왜 그랬을까.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그때는 참 많았다.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이 떳떳했고 부자가 부끄러워했다. 비싼 브랜드의 옷을 입은 선배는 묻지도 않았는데 내게 ‘이거 짜가야’라고 말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명품을 경멸하던 사회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의 ‘나이키’ 운동화를 본 나는 내 ‘나이스’ 운동화의 철자 ‘c’ 옆에 굵은 줄을 그어 ‘k’처럼 보이게 한 적도 있었다(물론 그 일은 친구들의 비웃음을 샀고 나를 더 쪽팔리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가 떳떳하고 부자가 부끄러워했던 것은 대학시절 동안 잠시였다.

정말 왜 그랬을까. 농활 때도, 공활 때도, 빈활 때도 그랬다. 부유하고, 유식하고, 권력을 가졌다는 것은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논두렁, 공장담벼락, 철거된 집터에 걸터앉아 먹었던 빈한한 안주들을 궁중음식 이상으로 상찬했고, 가난한 이들의 인생담을 현인의 말인 듯 귀를 기울였으며, 권력 없는 이들에게 세상을 바꿀 거대한 힘이 응축되어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가난한 자가 지상의 신”이었다.

돌이켜보면 아주 잠시였다. 소수의 예외적 인물들이 있기는 했지만, 가난을 추앙했던 사람들은 졸업 후 부를 추앙하는 세계에 들어가서도 잘 적응했다. 지식을 쌓아 존경도 받았고 권력과 권위를 뽐내기도 했다. 과연 그 시절 대학에서 일어난 가치의 전도, 그러니까 내가 화장실에서 뒤집어 입은 셔츠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대학시절 잠시나마 각성했던 것일까, 잠시 뭔가에 홀리고 도취됐던 것일까.

그 이상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건 최근에 읽은 책 때문이다. 폴 파머의 <권력의 병리학>. 지난 2월 세상을 떠난 이 위대한 의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이유, 그리고 그 병이 좀처럼 낫지 않는 이유를 파고들다가 사회구조적 폭력을 발견했다. 그는 이것을 바꾸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살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의료헌장은 의사에게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라고 했지 부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소수의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죽어가는 걸 방치하고 심지어 조장한다. 그는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다가 해방신학을 만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섬김’을 배웠다. 가난한 사람들은 구조적 폭력의 증언자이고 세상을 바꿔야 하는 이유이자 가능성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도 “우리처럼 양질의 치료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가난한 사람은 “우리보다 더 양질의 치료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지금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한때 나는 분명 이해했던 것 같다. 내 대학시절 해방신학은 낡은 이론이었지만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섬김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조차 개종한 지 오래되었다. 이제는 대학도 세상이 섬기는 신을 섬긴다. 부와 지식, 권력에 대한 비판은 약화되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둘러싼 논쟁만 시끄럽다. 대학에서도 가난한 자들은 경시와 무시의 대상이 되기 일쑤고 최근에는 고발의 대상까지 되었다. 나 역시 예전 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가 핀잔만 들었다. 그건 자해적 행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난은 되돌아볼 때만 아름답다는 사람도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셔츠를 뒤집어 입었던 젊은이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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