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만세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내가 어렸을 때 ‘부자’라는 말은 좋은 어감은 아니었다. ‘저 사람, 부자래’라고 시작하는 말 뒤에 따라붙는 십중팔구는 대개 나쁜 말이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부자의 모습도 좋게 그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욕심 많고, 인색하고, 고약한 인물이 태반이었다. 실제 세계에서 만나는 부자들도 대체로 그랬다. 선생님에게 촌지를 주는 부자 학부모도, 자동차를 타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와서 내리며 교장 선생님의 마중을 받는 육성회장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종종 뉴스에선 ‘땅투기, 집투기, 돈놀이’ 하다가 발각된 ‘있는 사람들’이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이 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혀를 차고, 침을 뱉고, 손가락질을 했다. ‘높은 사람’과 ‘있는 사람’들의 반사회적 범죄는 더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돈의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할지언정, 부자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친구 따라 교회에 갔다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부자가 되려면 그만큼 나쁜 짓을 많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었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세태가 바뀌어 ‘땅투기, 집투기, 돈놀이’로 큰돈을 번 사람들이 영웅처럼 떠받들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집을 20억원에 사서 40억원에 팔았다고 하면, 옛날에는 ‘도둑놈’이라 했건만 지금은 ‘투자의 귀재’요, ‘부동산 능력자’라고 불린다. 투기꾼은 투자자로 불리고, 돈놀이꾼은 버젓한 금융사업가로 탈바꿈했다. 불로소득자는 꿈의 직업이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부자들이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부자’라는 말에서는 역겨운 냄새 대신 천상의 향기가 난다. 부자들은 ‘힙’하고, ‘나이스’하며, 맘껏 ‘플렉스’하는 사람들이다. 돈 냄새는 경멸적 표현이었는데, 지금 ‘부티’와 ‘부내’는 계급의 문화자본을 상징한다. 부자 세계로부터 흘러나온 취향과 소비행태가 결코 생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건강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삶의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창조자이자 향유자로 대접받는 것이다.

부자 숭배는 빈자 혐오, 노동 혐오와 맞물려 있다. ‘내가 일하면 노동자, 돈이 일하게 하면 투자자’라는 투자회사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그 돈이 어디를 돌아다니며 누구에게 어떤 일을 저지르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새로운 부자의 정의는 ‘돈이 일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걸 못한 무능한 이들이 노동자가 되고 빈자가 된다는 말이다. 이런 혐오 선동(hate speech)이 미디어에 범람한다. 반면, 가난은 퇴치해야 할 질병이나 사회악처럼 규정된다. ‘빈곤층’이란 용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밀어내고, 청빈이나 청렴 같은 고결한 향기를 품은 가난의 의미는 사멸해가고 있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말하면, ‘다 같이 망하잔 말이냐’는 성난 목소리가 돌아온다. 가난 속에는 선함도 참됨도 아름다움도 깃들 수 없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우리는 가난의 윤리와 빈자의 정치에 대한 상상력을 빼앗긴다.

부자들의 지배는 언제부터 시작됐나. 1990년대 쇄도한 신자유주의, 특히 외환위기 사태가 중요한 분기점이다. 당시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덕담으로 창조한 건 카드회사였다. 저 금융 자본주의의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땐 충격이었는데, 이제는 다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인사말이 됐다. 군부 독재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던 이들도 시장 독재 앞에서는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부자가 민주정치를 하기란 코끼리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일이지만, ‘민주화 세력’은 부자의 반열에 사뿐히 올라섰다. 사람들이 부자의 범죄에 엄벌을 요구하면, 부자가 차별의 이유가 돼선 안 된다고 하고, 구조적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며, 그도 한 사람의 불행한 인간일 뿐이라고 변론했다. 약자의 언어를 강자의 언어로 둔갑시키는 희한한 논리는 어디서 발명되었던가. 어떤 독재도 조력자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부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고, 필요한 법을 만들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마름들이 있기 때문에 부자는 소수이면서도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이 지금처럼 무소불위의 전지전능한 힘을 가졌던 적은 없다. 지금처럼 부자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없고, 이곳만큼 부자들의 존엄함이 하늘을 찌르는 곳이 없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사회가 해체되면 돈이 법이 되고, 부자가 왕이 된다. 시장 왕국에선 부자들이 돈 많은 순서대로 왕이고 귀족이다. 국왕 전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는 대통령 각하 만세가 되더니, 이제 부자 만세가 되었다. 이토록 엉망진창인 정치도, 부자들은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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