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실종

[송두율 칼럼] 정치의 실종

여름방학 때 잠시 들린 손자에게 장래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소방관이라고 대답한다. 오늘날 존경받는 직업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많은 나라에서 대개 소방관, 의사와 간호사가 제일 앞에, 정치인이 거의 예외 없이 끝자리에 서 있다. 가뭄과 함께 무섭게 번지는 산불 진화작업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곳 포르투갈은 물론, 한국에서도 소방관이 맨 첫 자리, 정치인은 역시 꼴찌다. 가장 위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소방관과, 버나드 쇼의 지적처럼 ‘능변 수다쟁이들의 천국’인 정치판에서 노는 정치인을 대비시켜 정치인을 평가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대개 비슷하다. 그럼에도 선거는 있게 마련이고 이에 따라 너나없이 정치의 열풍 속으로 홀린 듯이 빠져 들어간다. 선거의 결과에 따라 승자는 당연히 전리품을 챙기며, 패자는 다음 선거에서 설욕할 것을 다짐한다. 여기까지는 정치가 겪는 기본적인 과정이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물론 예외적인 상황도 발생한다.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서 정당성을 인정받아 집권했으나 수임받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부족해서 정변이나 탄핵으로 중도에 하차하는 예도 있다. 전자는 5·16 군사정변으로 축출당한 장면 정부, 후자는 ‘촛불 혁명’으로 물러난 박근혜 정부를 예로 들 수 있다.

어떻든 선거를 계기로 해서 분출되는 정치에 관한 관심의 정도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지표로 여겨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38개 가맹국의 평균 투표율은 69%이다. 한국은 이보다 높은 77%를 기록하고 있어 비교적 상위권에 속한다. 유럽에서는 핀란드가 예외지만 일반적으로 북유럽 국가의 투표율이 높고 이탈리아를 제외한 남부 유럽국가는 대체로 이 비율이 낮다.

그렇다면 높은 투표율은 과연 건강한 민주주의의 척도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여러 경험적인 자료에 의하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유권자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저소득과 저학력층, 연령적으로는 젊은층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근거로 투표율이 높은 것은 상대적으로 중산층이 한 사회의 정치적인 안정 추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반대로 투표율이 낮은 것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치 사법화·언론도 여기에 한몫

그러나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빅딜’이 있을 때 온 사회가 총동원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지는 선거가 과연 민주주의의 바람직한 모습이 될 수 있는가. 오는 10월2일에 있을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 현직에 있는 우익 포퓰리스트 자이르 보우소나루와 과거 두 번의 임기에 걸쳐 대통령이었던 좌파 룰라 다 실바가 격돌하고 있다. 한국보다도 높은 투표율을 보이는 브라질 사회는 또다시 양분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선거 이후의 심한 갈등이 이미 예상된다.

OECD 가맹국 가운데 칠레와 포르투갈과 더불어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이는 일본의 사정은 또한 특별하다.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유세 중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살해되는 대형 사고까지 발생했으나 투표율은 전과 비교해서 조금 오른 56%였다. 이런 저조한 투표율의 주원인으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1955년 이후 지속하는 자민당의 보수적 체제를 대치할 대안이 없는, 정치적으로 짜증스럽고 지루한 상황이 있다.

유럽에서는 20여년 이래 선거에 적극 참여하는 비율이 거의 감소하거나, 설사 변화가 있어도 거의 미미한 상황이 지속하고 있으며 특히 경제와 재정위기 속에서 사회(민주)당과 같은 전통적인 좌파는 오히려 퇴조하고 대신에 우익 포퓰리즘이 일반적으로 득세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 ‘스웨덴 민주’의 약진은 전통적으로 사회당이 강한 스웨덴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불만이 투표행태에서 표출되는 이러한 현상을 영국의 정치학자 콜린 크러치는 껍데기만 남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탈(脫)민주주의’라고 진단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유, 벨기에 출신 여성 정치학자 샹탈 무프는 이런 경향을 한 걸음 더 나아가 ‘탈(脫)정치’라고 부른다. 눈앞에서 전개되는 사회적 모순과 갈등을 애써 피하거나 봉합하고, 어설픈 합의만을 추구하는 정치는 결국에 극우주의나 인종주의를 키운다는 뜻에서다.

기성 정치,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실망이나 환멸을 느끼는 유권자의 정치적 무관심이 ‘반(反)정치’의 흐름으로 연결되었던 선례도 적지 않게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에 남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잠깐 등장했던 ‘콸룽퀴스모’(‘보통사람’주의)나 드골의 제5공화국의 등장과 더불어 급격히 몰락했던 프랑스의 ‘푸자드주의’가 그런 예다. 기상천외한 공약을 내걸고 세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기성정치를 비난하고 희화하는 ‘국가혁명당’의 허경영 후보를 연상하면 대충 이해될 수 있는 반정치적 흐름이다.

유권자의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기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정치의 사법화’를 들 수 있다. 원래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현안을 번번이 법정으로 끌고 가다 보니 법조문 해석이 마치 정치의 본령인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국민은 지루한 법정공방에 지치고 따라서 정치에도 등을 돌리게 된다. 유럽에서는 그래서 법관만 있으면 됐지, 정치인은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는 반문이 자주 제기된다.

최근에 당권을 둘러싼 국민의힘 내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태는 정치가 스스로 풀어야 하는 과제를 법에 의존해서 해결하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법적인 규범은 정치적인 행위로 창출되고, 이런 정치적 행위는 또 법적인 규범에 의해서 통제되는 법과 정치 사이에 상호규정성이 있다. 그러나 법이 일방적으로 정치의 수단이 되는 상황에서 정치는 실종되기 마련이다.

몹쓸 정치에 멀어지는 한반도 평화

이와 더불어 정치실종의 중요한 원인 제공자로 흔히 언론매체가 지목된다. 정치나 정책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보도하기보다는 편향적이고 왜곡되거나 흥미 위주의 보도가 남기는 나쁜 결과를 두고 미국의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1847~1911)는 ‘냉소적이고 매수될 수 있는, 선동적인 언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자기와 똑같이 비열한 국민을 낳는다’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나쁜 언론이 나쁜 정치를 만들고 또 나쁜 정치가 나쁜 언론을 낳게 마련이기에 ‘권언유착’은 정치를 망가뜨리는 빠른 길이다. 얼마 전 언론사의 기자가 취재윤리를 벗어나 취재원을 회유, 협박해서 편향된 검찰의 수사를 도왔다는 의혹을 받고있는, 이른바 ‘채널A’ 사건도 그런 길의 하나다.

특히 사회적으로 큰 쟁점이 되는 사건에 대해서도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아니면 충실한 탐사 없는 결론을 반복해서 독자에게 전달하는 제도 언론의 폐해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충분히 여과되지 못한 보도와 논평은 특히 소셜 미디어가 중요한 대중매체로 자리 잡은 오늘날,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속시킨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언론매체가 얼마나 정치적 무관심이나 증오감에 영향을 주고 있는가에 대한 경험적 연구는 많다. 정보보다는 흥미나 오락 위주의 미디어가 정치적 무관심을,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로 정치적 무관심 때문에 흥미나 오락에 관한 정보를 찾게 되는지를 두고 사회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이에 대해서 스위스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921~1990)는 간결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해석을 했다. ‘러시아에서 당이, 미국에서는 TV가 국민을 바보로 만들었다.’ 과도한 정치적 선동과 선전이나 흥미나 오락 위주의 정보매체는 똑같이 국민을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몰고 가, 결국 쓸모 있는 정치적인 바보로 만든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복잡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정치 실종은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와 경제위기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이즈음 더더욱 문제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위기의 심각성은 누구나 감지할 수가 있기에 정치에 거는 기대도 크지만, 낙관적인 전망은 지금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특히 대선과 그 이후의 한국의 정치상황을 지켜보면서 정치의 모습이 지금처럼 앞으로도 보인다면 당장 원하는 민생 문제의 해결은 물론, 한반도의 평화정착도 정말 어려운 이야기라고 느껴진다. 한가위를 보내면서 멀리서 지나친 기우를 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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