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공백과 피해자의 생존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작년 12월23일 헌법재판소는 19세 미만의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물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처벌법 제30조 제6항을 위헌이라 결정했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위헌 결정의 주된 이유는 피해자의 진술이 담긴 영상녹화물로 재판을 하는 것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침해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지난 9개월 동안 1심과 항소심에서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가 법정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하는 일이 이어졌다. 심지어 영상녹화물로 유죄 인정을 받고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고등법원에 되돌아온 사례도 속출했다. 장애인 성폭력 사건이나 아동학대 사건의 피해자 진술 영상녹화물은 위헌 결정의 범위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법원은 이미 위헌의 취지를 넓게 고려하여 장애인과 학대 피해 아동을 법정에 증인으로 부르고 있다.

헌법재판소 결정은 ‘후속입법이 되기 전까지는 시행한다’는 식의 단서를 달 수 있는 헌법불합치결정이 아닌 단순위헌결정이었기에, 결정 즉시 법의 효력은 없어졌다. 그래서 그 결정일부터 지금까지 피고인이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물을 부인하면 피해자는 예외 없이 법정에 불려나오고 있다.

이와 같이 전혀 예외가 없는 상황은 퍽 이례적이다. 미국은 형사절차에서 피고인의 인권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법정에서 피해자와 대면하여 반대신문할 수 있는 권리를 심지어 연방헌법 수정 제6조에 명문으로 두고 있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 형사절차법은 아동이 피해자로 지목된 사건에서 영상녹화진술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법정증언을 대체할 수도 있는 예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 예외 인정 사유도 다양하다. 아동이 두려움으로 인해 증언할 수 없는 때, 아동이 증언으로 인해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 있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전문가 증언에 의해 뒷받침될 때, 아동이 정신적 또는 기타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을 때, 피고인이나 변호인의 행동으로 인해 아동이 증언을 계속할 수 없게 될 때에는 아동이 직접 법정에 나와 증언하지 않아도 영상녹화진술로 법정증언을 대신할 수 있다.

우리보다 더 두껍게 피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나라에서조차 아동 피해자를 위한 예외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예외 없이 법의 효력이 즉시 소멸되었으므로 빠른 후속입법이 절실했다. 소관부처인 법무부는 위헌결정이 있은 지 6개월이 지난 5월 말,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지난 6월 국회에 정부입법안으로 보내진 이 개정안에 따르면 앞으로 미성년과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사건은 아동전문조사관에 의하여 피해자 조사가 이루어진다. 수사단계에서 피해자가 증거보전절차 전담판사 앞에 가서 피해를 진술할 때 피의자 측에 반대신문 기회를 주는 증거보전 절차도 생긴다. 기소된 이후 재판부는 피해자 증인신문을 위한 공판준비절차를 열어야 한다. 피해자가 증언할 때는 직접 법원에 가지 않고 비디오 등 중계시설을 통하여 진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여느 사건처럼 검사와 피고인 측이 각각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이 아동전문조사관을 통하여 피해자에게 질문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보완할 점이 없지 않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정부입법안이 나온 지 석 달이 지나가는데도 미성년 피해자에게 가혹한 이 입법공백을 메울 국회의 움직임이 더디기만 하다.

스토킹 범죄로 재판받던 범죄자가 피해자를 살해하기 전에도 예방을 위한 법안들은 국회에 묵혀 있었다. 생존이 버거운 피해자는 이 입법공백이 부당하다고 목소리 내기 어렵다. 예외 없이 법정에 나가야 하는 현실에 신고를 포기하는 피해자가 더는 생기지 않도록 국회의 조속한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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