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한자를 공부하자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나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다. 독자들의 언어를 상상하고 변화를 가늠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무지하다고 탓하는 습관이 내게는 없다. 주어진 원고를 잘 읽히는 한국어로 다듬는 일도 벅차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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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우리가 ‘한국어’라고 부르는 모호하고 흐릿한 대상이 수천만의 개인이 사용하는 언어들의 집합이라는 점이다. 교육 수준과 독서량뿐 아니라 출신 지역이나 가족 구성, 심지어 식습관이나 취미 생활에 따라서도 언어는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받은 원고 중 ‘심심한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라는 표현이 있다면, 편집자들은 ‘심심한’을 ‘깊은’으로 고친다. 문맥상 반드시 사과의 마음이 잘 전달되어야 한다면 그편이 낫다.

물론 작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에게 ‘심심한’은 ‘깊은’보다 더 간절한 마음을 담은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한국어에서 ‘심심한’은 대체로 ‘깊고 간절한’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삼십년 전 청춘소설 인물들은 ‘심심한’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말장난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미 그 단어는 같은 발음의 다른 단어에 묻혀버린 것이다(퉁명스러운 편집자라면 꼭 일본식 한자어를 써야 하냐며 되물을 수도 있다).

반면 어떤 평론가가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이라는 구절이 있는 글을 주었다면 어떨까. 이것은 난해하다기보다는 어색하다. ‘명징하게’라는 말은 ‘밝을 명(明)’자와 ‘맑을 징(澄)’ 자를 쓴다. 이는 ‘명료하게’나 ‘명확하게’보다 시각성이 강한 형용사이며, 물이나 유리, 거울처럼 투명하고 반짝이는 이미지를 지닌다. 생각이 ‘명징하게 떠오른다’고 쓰거나 할 때 어울린다. 관형사형으로 ‘사유’나 ‘언어’와 같은 정신적인 명사를 수식할 때도 무난하다.

그러나 ‘직조(織造)하다’라는 말에는 섬유의 질감이 있다. 올과 올이 엮인 이 촉각적인 느낌은 투명하고 반짝이는 단어인 ‘명징하게’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명징하게 직조하다’는 표현을 본 기억도 없다. ‘상승과 하강’의 운동감 역시 씨실과 날실이 가로세로로 교차하는 ‘직조하다’의 뉘앙스와는 다르다. 즉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이라는 문장은 헐겁게 덜그럭거린다.

우리는 펜을 놓고 생각에 잠긴다. 고생한 필자에게 글을 통째로 고치자고 하기에는 미안하다. 단어의 의미와 어감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명징하게’라는 단어만 ‘섬세하게’로 바꾸자고 할까? 그러면 덜 어색해지지만, 그의 의도가 훼손된다. 그러면 모든 단어들이 헛돌고 있는 이 구절을 그대로 인쇄해도 되는 것일까?

망설이다 우리는 문장을 다시 쓰자고 권할 것 같다. 평론가의 글은 정확해야 하니까. 단어가 주는 질감과 의미가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면 만드는 이도 보는 이도 즐거울 테니까.

문해력을 둘러싼 날선 말들을 보는 편집자의 마음은 착잡하다.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정확하게 글을 쓴다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 뜻을 이해한다. 그러나 취약한 문장력은 언제나 대중의 문해력을 핑계로 삼는다. 젊은 세대가 책을 안 읽는다거나 자기가 모르는 단어를 쓰는 것을 싫어한다는 식의 말 역시 고약하다. 출판사들은 젊은 세대, 특히 여성들을 가장 중요한 독자로 생각한 지 오래이며, 더 쉽게 글을 써 달라는 대중의 요구는 언제나 독서와 출판의 역사를 견인해 왔다.

가장 나쁜 것은 젊은이들이 한자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식의 말이다. 글쎄, 국회가 ‘파행되었다’는 말에는 ‘절름발이 파(跛)’자를 쓴다. 한자깨나 아는 이들이 이 말을 수십년간 고치지 않고 써온 것인가. 어렴풋이 뜻만 눈치채면 정말 한자를 ‘아는’ 것인가. 알고도 ‘잠룡’이니 ‘역린’이니 하는 왕조 시대의 한자어를 공화국의 정치인들에게 쓰는 것인가. 젊은 세대의 문해력을 탓하기 전에 우리 함께 한자 공부나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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