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오르막길과 산복도로

이광표 서원대 교수
부산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본 풍경

부산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본 풍경

부산의 슬로건은 ‘다이내믹’이다. 그 다이내믹의 실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저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원도심 일대(동구, 중구, 서구 등)의 오르막길이라고 생각한다. 부산 도심엔 산이 많다. 산 바로 앞은 바다. 평지가 부족하니 바다를 메웠고 산의 경사면에 터를 잡아야 했다. 산자락에 집들이 빼곡 들어서면서 미로 같은 골목이 생겼고 도처에 가파른 계단이 등장했다. 일제강점기 때, 부두 노동자나 방직 노동자 같은 힘없는 한국인들은 초량동, 대신동, 아미동 일대의 산지로 밀려났다. 광복 직후엔 귀환동포들이, 6·25 전쟁기엔 수많은 피란민들이 도심의 산지로 몰리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수십 갈래의 오르막길은 산중턱에서 산복도로와 만난다. 1960년대 산허리를 따라 조성된 도로다. 산복도로를 따라가면 이바구길이나 알록달록 감천마을, 비석마을이 나온다.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보는 부산의 풍경. 부산 근현대 수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 수난을 이겨낸 부산 사람들의 몸부림이 꿈틀대는 듯하다. 이게 다이내믹 아닐까.

산복도로 일대는 요즘 인기 있는 관광 코스가 되었다. 이곳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카페와 벽화다. 전망 좋은 곳엔 어김없이 카페가 들어섰고 골목골목은 벽화로 알록달록 장식되었다. 그런데 이곳의 이런저런 벽화를 보면, 참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마을의 특성이나 내력을 표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별 내용도 없고 특별한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시련을 이겨냈기에, 그 삶은 알록달록 빛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산복도로 오르막길이 언제까지나 무채색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의 지난했던 삶을 너무 쉽게 채색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의 근대 골목에 벽화가 무차별로 파고들고 있다. 거리 벽화가 생활문화예술의 보증수표인 것처럼 남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근대건축물이라고 하면 으레 카페나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근대 골목이라고 하면 으레 벽화를 그려넣는다. 지극히 상투적이고 획일적인 사고방식이다.

최근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됐다. 임시수도 대통령관저(현 임시수도기념관), 임시수도 정부청사(현 동아대 석당박물관),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비석마을), 부산항 제1부두, 유엔묘지 등 9곳이 포함됐다.

9곳 모두 의미 있는 공간이지만, 가장 상징적인 곳은 아미동 비석마을이 아닐까 한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다. 6·25 전쟁기 피란민들이 부산에 몰리면서 정착할 땅이 부족하자 사람들은 이곳에 집을 지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공동묘지에 모여 살다니…. 사람 뼈가 나오는 무시무시한 곳이었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묘비와 상석을 계단 디딤돌이나 옹벽과 집의 주춧돌로 사용했다. 처절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비석마을에도 여기저기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별 의미 없는 저 벽화들이 혹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기본 요건인 진정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지.

말이 나온 김에, 임시수도 정부청사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이곳은 현재 동아대 석당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도 잘 정돈되어 있고 박물관 콘텐츠도 우수하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정부청사였다는 흔적이나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피란수도 흔적에 대해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이는 우리 시대 부산의 원형질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부산시가 내년에 슬로건을 바꾼다고 한다. 슬로건이 무엇으로 바뀌든, 원도심 오르막길과 산복도로가 부산의 DNA라는 사실은 여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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