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 사회에디터

매일 새벽, 146번 버스는 만원이다. 이 버스 첫차를 가득 채우는 승객들은 강남 빌딩에서 일하는 청소·경비 노동자들이다. 서울 상계동에서 강남역까지 가는 146번 버스는 번호만 다른 ‘6411번 버스’다. 이 버스는 노회찬 전 의원이 버스 안 풍경을 전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2012년 진보정의당 출범 당시 노 전 의원은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로 시작하는 대표 수락연설에서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청소노동자들을 우리 사회 “투명인간”이라고 불렀다. 그의 사망 후 더 유명해진 이 연설은 지금 들어도 먹먹하다.

이명희 사회에디터

이명희 사회에디터

안타깝게도 이들의 새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노 전 의원의 외침은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서울시가 2019년 6월 새벽 노동자가 몰리는 146번을 비롯해 4개 노선의 첫차 배차를 늘리긴 했다. 이들이 일찍 집을 나서는 이유는 하나다. 당신이 출근하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언론을 타도 달라지는 것 하나 없는 새벽이 이들에게는 야속하기만 했을 터이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 새벽 노동자들의 민원 하나가 해결됐다. 새해 첫 출근날인 지난 2일 146번 첫차를 탄 한덕수 국무총리가 첫차 시간을 앞당겨 달라는 이들의 청을 들어준 것이다. 첫차 시간이 오전 3시50분으로 15분 당겨진 8146번 버스가 이달 16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당장 “정치쇼 그만하라”라는 정의당의 비판이 나왔지만 나는 굳이 ‘쇼’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새벽 노동자들의 고단함이 조금이라도 해소된다면 다행 아닌가. 물론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다.

버스는 되고 왜 지하철은 안 될까

이 뉴스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버스’는 되는데 왜 ‘지하철’은 안 되냐는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가 해가 바뀌고도 이어지고 있다.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온 건 2001년 1월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사고 이후다. 이때부터 장애인들은 이동권을 외치며 버스와 지하철을 막아섰다. 장애인도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함께 살자고.

그 뻔한 얘기를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다 들어주지 못했다. ‘하겠다’는 약속은 있었다. 2002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원순 전 시장은 2022년까지로, 오세훈 시장은 2024년까지로 기한을 다시 늦췄다. 그 약속들이 지켜질진 모르겠다.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니까.

올해 정부 예산에도 장애인 권리 예산은 턱없이 적게 배정됐다. 전장연이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지하철 시위를 멈추지 않는 데는 이런 현실이 있다.

그렇다 해도 1년 넘게 이어진 전장연 시위에 시선이 마냥 좋을 리가 없다. 너나없이 힘든 세상 아닌가. 당장 지각이라도 하게 되면 그나마 있던 알량한 이해심마저 사라진다. 사정은 알겠는데 “굳이 출근 시간에 해야 하나?” 나도 묻고 싶다. 맘만 먹으면 첫차 시간쯤은 가뿐하게 당기고,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인하엔 재빠르면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대한 약속은 왜 이토록 더딘가?

그래서 씁쓸하다. 이번에 새벽 버스가 새로 생긴 것은 한덕수 총리가 해결을 약속한 지 보름 만이다. 서울시 등 관계기관 논의를 마친 뒤라곤 해도 속전속결이다.

한국에서는 장애인도 청소노동자처럼 우리 곁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이다. 가혹한 것은 ‘투명인간’의 목소리는 때론 누군가 죽어야 들린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새벽 노동자들의 출근에 힘을 보태는 것은 언뜻 보기에 그들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당신들이 출근하기 전에 청소를 끝낼 수 있게 선뜻 손을 내민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더 많은 권리를 달라고 불평하지 않을 때까지만. 20년 넘게 이어진 전장연의 시위에 모두의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것은 그들의 요구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 같아서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소음’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자리에 없을 거라는 확신만큼 무심함은 커진다. 이게 어디 나만의 문제일까.

전장연에 마음을 조금 내어주자

수많은 투명인간들의 ‘투명 망토’를 벗기는 것은 쇼가 아닌 정치의 영역이다. 무엇보다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보여주지 않았는가. 새해 첫날 현충원 방명록에 “약자와의 동행은 계속됩니다”라고 적은 오세훈 시장은 전장연을 몰아세우는 일을 그만해야 한다. ‘시민 불편’을 이유로 ‘무관용 원칙’만을 내세운다면 약자와의 동행을 말해서는 안 된다.

또 한 살 먹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들의 싸움이 빨리 끝나도록 마음을 조금 내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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