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탓, 남 탓, 전 정권 탓

조홍민 사회에디터

“남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최종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나라와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안전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조홍민 사회에디터

2010년 1월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버락 오바마가 국민 앞에 섰다. 직전 연말 성탄절에 일어난 항공기 테러 미수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한 남성이 미국 여객기 안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사건에 미국은 경악했다. 참사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278명의 승객이 탄 비행기에 폭탄을 지닌 테러범이 어떻게 탈 수 있었는지, 보안검색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었는지 등 책임소재를 놓고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오바마는 자신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다. 테러가 미수에 그쳤는데도 말이다. 그냥 말로만 ‘책임 운운’ 하지도 않았다. 종합적인 원인 분석은 물론 구체적인 대책을 내놓았다. 테러 미수의 원인을 국가보안 시스템의 실패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보완조치를 약속했다. 국토안보부에 10억달러 지원계획을 밝히면서 항공기 탑승 전 보안검색을 강화하고 알몸 투시기와 같은 최첨단 승객 검색 기법을 개발해 실용화할 것을 지시했다.

그의 발언에서 최고 통치자로서의 무게와 책임감, 결연함을 느꼈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여태껏 분노와 질책, 남 탓만 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익숙해지다보니 말이다.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총체적 난맥상을 드러내며 지난 12일 막을 내렸다. 개영 첫날부터 폭염과 벌레, 화장실·샤워장 등 위생 준비 부족으로 참가자들의 원성을 사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부 국가의 대원들은 대회 도중 철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부랴부랴 기업과 공무원을 동원해 부족한 물자와 시설을 보충·개선하면서 가까스로 대회를 마쳤다.

파행으로 점철됐는데도 잼버리가 끝난 뒤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며 사과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망칠 뻔한 잼버리’를 자신들이 힘을 모아 성공적으로 끝냈다고 주장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무난하게 마무리함으로써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지켰다”고 했다. 대단한 ‘정신승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책임은커녕 일말의 자기성찰도 찾아볼 수 없다. 잼버리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인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여가부가 잼버리 행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부족했다는 지적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잼버리 기간 각국 대원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음에도 책임 떠넘기기와 비판 무마에만 급급했다. 김 장관은 1년 전 국정감사에서 “잼버리 대책을 다 세워놔서 차질 없이 준비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신만만해하던 분이다.

‘전 정부 타령’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대회 유치가 확정된 2017년 8월 이후 5년간 문재인 정부와 전북도는 대회 부지 매립과 배수 등의 기반시설과 편의시설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아 ‘잼버리 파행’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 “(새만금을 개최지로 선정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게 모든 잼버리 사태의 근본 원인”(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이란 발언이 나왔다. 충분히 예상됐던 바다. 159명이 인파에 깔려 숨진 지난해 10월 이태원 참사 때도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고…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는 인식을 보여준 정부니 말이다. 지난달 집중호우로 14명이 목숨을 잃은 충북 오송 지하차도 참사 때도 부실한 대처가 문제 됐지만 도지사와 시장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지 았았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여가 지났지만 달라진 건 없다. 다수의 국민이 비극적 재난을 당해 목숨을 잃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사고가 터지면 ‘엄중 문책’ ‘재발 방지’를 외치며 기계적으로 개선 대책을 내놓는다. 재탕, 삼탕이다. 구체성이 결여된 감성적 언어만 난무하고 ‘네 탓 공방’ ‘전 정권 책임론’은 지겹도록 되풀이된다. 도대체 왜 집권을 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분노와 질책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무능과 비겁함은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17세기 프랑스의 법학자 앙투안 루아젤이 쓴 <관례집>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막을 수 있는데 막지 않았다면 죄를 지은 것이다.” 윗분들이 두고두고 새겨둬야 할 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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