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공업입국’ 정신으로 지금의 나라를 만들었다. 많은 논란에도 박정희의 확실한 공적은 카이스트를 비롯해 공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주변 장치도 같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후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기술자를 우대하고, 기술이 모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최초의 인터넷 회선실험을 한 사람은 카이스트 교수였던 전길남이었다. 그는 일본 교포였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나사(NASA)에서 일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박정희 정권의 기술 우대 정책 때문이었다. 결국 1982년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인터넷 연결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전길남의 제자들이 삼보컴퓨터와 넥슨, 엑스엘게임즈(리니지 개발), 아이네트 등을 창업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한국이 그냥 IT 강국이 된 것은 아니다.
WTO가 출범하면서 금융을 통해 수출에 주던 지원금은 금지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은 수출 지원을 연구·개발 지원으로 전환하였다. 그렇게 10년 정도 지나고 나니까, NIS(National Innovation System)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공공기술을 비롯해 이제는 개별 기업의 혁신 시스템이 아니라 국가가 어떤 혁신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가가 경제의 핵심이 되었다.
1997년 정권 교체가 되었지만, 김대중 정권은 이 흐름을 승계하였다. 외환위기로 기업은 물론 국가도 초유의 위기에 빠졌다. 민간이 연구·개발비를 줄인 만큼 정부는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외환위기 한가운데에서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금은 늘어났다. 한국은 그 이후 위기에서 탈출하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에도 기업이 연구·개발비를 줄이지는 않았다. 이제 기업도 다른 건 줄이더라도 연구·개발비를 줄이지는 않는다. 이명박 정부도 세계적인 경제위기 국면에서도 연구·개발 투자를 늘렸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생존했고, 수많은 세계적 위기에도 버텨왔다.
IMF에도 연구개발비 늘었는데…
공업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서비스업으로 더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스웨덴, 스위스 등 1인당 국민소득으로 앞줄에 선 나라 중 그렇게 한 나라는 없다. 유럽과 달리 서비스업 비중이 더 높았던 미국도 오바마 이후로 공업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정책을 도입하고, 심지어 편법에 가까운 국수주의 정책도 과감히 도입한다.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결국은 미국에 공장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IRA(Inflation Reduction Act),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되었다. 반도체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눈물 날 정도다.
상황이 이런데, 윤석열 정권은 그 어떤 정권도 하지 않은 연구·개발비를 대폭 삭감하는 정책을 과감히 제시하였다. 그전에 연구·개발비를 대폭 증대해 기술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예전에 자신이 한 얘기도 다 까먹었다. 과거 어느 왕이 침대에서 왼발로 내려온 날은 조용했지만, 오른발로 내려온 날은 피바람이 불었다는 얘기와 다를 바가 없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공동의 투쟁 경험도 없고, 분야도 워낙 달라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게 그들만의 일은 아니다.
연구·개발 분야에서 젊은 연구자와 대학원생들이 그 삭감의 피해를 온통 뒤집어쓰고 있다. 인건비가 줄면, 젊은 연구진과 비정규직 연구진부터 해고한다. 프로젝트가 사라지면, 그들 중 상당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막 줄인 거라서, 우주항공 분야는 물론이고 코로나 백신 연구 같은 데도 일괄 삭감의 대상이 되었다. 공업은 그냥 죽어라고 일하면 되는 분야가 아니다. 결국은 지식의 일인데, 그 연구 인프라가 지금 붕괴되고 있다.
이제 공은 민주당으로 넘어간다
이제 공은 민주당으로 넘어간다. 다른 것은 건별로 증액할지 감액할지 그렇게 살피지만, 연구·개발 분야만은 정부 최종안 이전의 초안부터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근본적으로는 진보 정치에서 연구·개발은 무엇인지, 그 철학의 재정립과 청사진을 지금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뭘 살리고, 뭘 더 강화할지 체계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이 분야만큼은 민주당 내에 별도의 태스크포스를 만들고, 예산 검토에 들어가기 전에 현장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목소리를 길게 듣는 프로세스를 만들면 좋겠다. 서류만으로 그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구·개발은 원래 정치의 영역은 아니다. 그렇지만 연구·개발 예산 삭감과 함께 정치의 영역, 여의도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진보 정치 1번지가 과학과 기술에서 최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저성장 국면으로 넘어간 윤석열 경제가 아사(餓死)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박정희 이후의 국가혁신시스템을 그냥 죽일 것인지, 아니면 개혁안을 만들 것인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