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동독 인권 개선에 압력·지원 병행… 정치선전 목적 이용 안해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송윤경·심혜리 기자

인권 개선은 어떻게 이뤄지나 - 과거 사례

“과거 당신은 박정희 정부의 인권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이번에 북한에 가서 인권문제를 언급했는가?”

“북한 정부의 정책 안에 인권 관련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밖에서 어떻게 해서 바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인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먹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북한으로 가는 식량 지원을 억제하고 있다. 이는 정치나 군사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백한 인권 침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이나 미국 정부는 북한 정부에 인권과 관련해 바라는 바가 있겠지만, 우리가 통치를 직접 하지 않는 입장에서 관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4월28일 평양을 방문하고 서울에 들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장에서 한 한국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 한국 인권에 관심 미국 카터도
‘지원+압력’으로 박정희 압박
유신 비판자에 큰 힘 실어줘
‘고립’만으론 인권 개선 불가능

카터 행정부는 1977년 취임 직후 불거진 코리아 게이트와 의회 프레이저 청문회 등을 통해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이후 중앙정보부의 뉴욕 총책임자 손호영 참사, 주미대사관 김상근 참사관, 주미대사관 이재현 공보관장, 주캐나다대사관 양영만 영사 등 북미지역 공관에서 정보요원, 외교관들이 잇달아 망명했다. 재임 시 ‘인권 대통령’으로 불린 카터는 1979년 6월 방한 때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 총재를 만났다. 김영삼은 카터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를 요구해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에 박정희가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하자, 카터는 주한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을 소환하며 한·미관계는 악화됐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6일 청명평화포럼에서 발표한 ‘박정희 유신체제의 정치적 성격’에서 “카터 행정부의 정책은 유신체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박 정권 비판자들에게 큰 힘을 실었다. 비록 유신체제 붕괴를 직접 ‘교사’하지는 않았더라도 국내 비판자들에게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은 한국에 경제지원을 해주되 인권 상황을 지적하면 한국 정부가 일부 들어주는 식으로 인권 개선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 당시 한국 인권 개선은 미국의 압박과 지원 병행 전략이 일정 부분 기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카터가 인권문제에 접근할 때 동맹국 박정희 정권과 미수교국 북한 정권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운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이 존재했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다는 데 차이가 있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은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인권 탄압국’이라는 오명은 모든 외교 역량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할 대상이었다. 1975년 외교부에 들어간 송민순 전 외교장관은 지난해 국회에 북한인권결의안을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70~80년대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인권압력을 아주 많이 받았다. 나도 그때 현장에 있었는데 우리는 다 부인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그러한 압력에 아래부터 대통령까지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대외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을 제외하면 국제사회 의존도가 ‘제로’에 가까운 2012년 김정은 정권은 인권 탄압국이라는 오명이 1970년대 박정희 정권만큼 아프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동독의 한 어머니가 1989년 어느날 서독으로 이주하는 딸과 헤어지기 전 철문을 사이에 두고 울고 있다. 독일은 그해 11월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며 동서독 자유왕래를 허용했고 약 1년 뒤인 1990년 10월3일 분단 41년 만에 통일을 이뤘다. 동서독 교류·협력은 인권 개선과 통일 비용 감소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동독의 한 어머니가 1989년 어느날 서독으로 이주하는 딸과 헤어지기 전 철문을 사이에 두고 울고 있다. 독일은 그해 11월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며 동서독 자유왕래를 허용했고 약 1년 뒤인 1990년 10월3일 분단 41년 만에 통일을 이뤘다. 동서독 교류·협력은 인권 개선과 통일 비용 감소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남한의 인권 개선 경험은 북한에 일정한 시사점을 주지만 남한이 분단 직후부터 자본주의 질서 안에 깊숙이 들어왔다는 점에서 동일선상에서 비교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비슷한 분단국이던 동독의 인권 개선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독은 1949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동독의 체제 붕괴를 위해 동독 국민들을 상대로 정치 선전활동 일변도 정책을 펼쳤다. 서독 연방전독일문제부(한국의 통일부에 해당)는 선전물을 동독 국민들이 접할 수 있도록 전단 살포 반공단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동독은 총격을 가하는 등 반격에 나섰고 동·서독 관계는 심각한 대결국면으로 치달았다. 서독의 선전활동은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는 명분이 됐다.

서독에서는 동독을 고립시키고 규탄하는 방식만으로는 동독 내 인권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자성이 일어났다. 이후 시도한 방식은 동독 정부와의 비공식 협상을 통해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고 정치범을 데려오는 ‘프라이카우프’였다. 동독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활동과 체제전복 시도보다 구체적인 인간의 고통 해결을 위해 적국과 협상에 나선 것이다. 또 서베를린 시민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동베를린의 가족, 친지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통행증협정도 체결했다. 동시에 서독은 동독 내 인권침해 사건 기록을 모으는 잘츠기터 중앙기록보존소 설치 등 압박도 멈추지 않았다.

1969년 이후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자민당 연정은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정권과 대화를 시작하며 동방정책을 폈다. 서독은 동독 체제 전복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공식석상에서 인권문제를 계속 제기했다. 1972년 체결된 동·서독 기본조약에서 ‘인권보호’를 명문화했다. 이즈음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한 소련의 요청으로 동·서방 양 진영 간에 시작된 ‘헬싱키 프로세스’에서 서방은 인권문제를 틀거리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다.

분명한 것은 브란트 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때까지 서독의 어떤 각료도 동독 체제 붕괴를 겨냥하거나 정치 선전 목적으로 인권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령 자민당 출신 외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1985년 연방의회 연설에서 “인권문제 해결에 필수불가결한 동독 정부의 협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체제 안정의 파괴를 노린다는 인상을 불러일으켜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보수정당인 기민련의 헬무트 콜 총리도 작더라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인도적 사업의 진전을 통해 분단의 고통을 줄이고 동독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서독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라고 믿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동독 주민의 서독 합법 이주와 프라이카우프 방식의 정치범 거래는 꾸준히 늘어 1980년대 중반 최고조에 달했다. 서독 정부는 조건 없이 1983년 10억마르크, 1984년 9억5000만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다.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았지만 서독의 물질적 지원에 동독 역시 서독이 원하는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독은 평화와 동독 내 인권 개선을 함께 추구했다.

이동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서독 정부는 인권을 둘러싼 정치 선전적 고성과 이데올로기적 질타가 실제 곤경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되지 못함을 꾸준히 환기시켰다”며 “규범적 차원의 인권 정책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실용적 차원의 인권 정책, 현실적 화해협력 정책이 견고히 전제되고 충분히 강화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정치부), 송윤경(사회부), 심혜리(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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