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1년

“내 고향, 친구들은 잘지낼까”…죽음 공포보다 그리움이 큰 아이들

고귀한 기자
17일 오후 고려인 5세 황드미트리군(9)이 광주 광산구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고귀한 기자

17일 오후 고려인 5세 황드미트리군(9)이 광주 광산구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고귀한 기자

‘깊은 바닷속은 너무 외로워 / 춥고 어둡고 차갑고 때로는 무섭기도 해 / 그래서 나는 매일 꿈을 꿔.’

고려인 5세 황드미트리군(9)은 한글 연습장에 동요 ‘문어의 꿈’ 가사를 빼곡하게 적어놨다. 조금은 삐뚤빼뚤하지만 정성 들여 꾹꾹 눌러써 연필 자국이 뒷장에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문어의 꿈’은 황군이 한국에서 처음 배운 동요이자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단순한 멜로디에 쉬운 가사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어서일까. 이 동요는 광주광역시 고려인마을에 사는 아이들 대부분이 좋아해 흥얼거린다.

17일 오후 고려인 5세 황드미트리군(9)이 광주 광산구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친구와 악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고귀한 기자

17일 오후 고려인 5세 황드미트리군(9)이 광주 광산구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친구와 악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고귀한 기자

러시아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황군은 지난해 12월7일 한국에 왔다. 3남매 중 막내인 황군은 아버지 박에쁘게니씨(52), 어머니 황나탈리아씨(48)와 함께였다. 결혼해 분가했던 형(26)과 누나(24)는 지난해 4월, 7월 먼저 입국했다. 이들은 모두 광주고려인마을의 항공권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고려인 5세 황드미트리군(9)이 ‘문어의 꿈’ 가사를 받아쓰기한 한글연습장. 고귀한 기자

고려인 5세 황드미트리군(9)이 ‘문어의 꿈’ 가사를 받아쓰기한 한글연습장. 고귀한 기자

황군은 우크라이나 셰브첸코지역의 한 외곽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우크라이나 국적은 갖고 있지 않다. 황군 부모는 우크라이나에 13년 전부터 터를 잡고 생활했지만 우즈베키스탄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황군 국적도 우즈베키스탄이다.

부모님은 원래 양파를 재배했다. 황군은 양파 농장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자랐다.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지만 또래 친구들이 있어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강아지 5마리와 산책하거나 뒹굴다 보면 해가 저물곤 했다.

평온했던 일상이 바뀐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면서였다. 부모님은 농사일보다 집에 머물렀으며, 황군에게도 집 앞 말고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다. 그때부터 멀리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쾅쾅’ 폭탄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하나 둘 떠났다. 마을은 금세 스산해졌다. 황군 가족도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황군은 강아지들을 데려가야 한다고 떼를 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17일 오후 광주 광산구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고려인 아이들이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고귀한 기자

17일 오후 광주 광산구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고려인 아이들이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고귀한 기자

황군은 피난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들 역시 말을 아꼈다. 황군 가족들은 모두 우즈베키스탄을 통해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황군이 우즈베키스탄은 물론 조상의 땅인 한국을 찾은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다.

황군 가족은 입국 직후 광주 광산구 평동에 있는 ‘고려인 공동 쉼터’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 현재는 광산구 월곡동에 있는 고려인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곳에는 옛 소련 시절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됐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고려인 후손 7000여명이 모여 산다.

삶은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황군은 마당이 있는 널찍한 집 대신 5평 남짓 원룸에서 부모님과 생활하고 있다.

대부분 시간은 혼자 보낸다. 부모님은 아침 일찍 일용직 일을 나서면서 황군의 점심을 미리 챙겨둔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하는 아이 걱정에 휴대전화도 1대 놓고 간다. 황군은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며 심심함을 달랜다.

황군은 다음달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부모님이 한국에 정착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황군은 잘 알고 있다. 최근 광주 광산구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한글 공부에 열심인 이유도 그래서다.

장난기 많은 황군은 한글 수업을 같이 받는 친구들과 친하다고 했다. 그런데 까르르 웃고 떠들다가도 갑자기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고향 친구들과 두고 온 강아지들이 불현듯 떠오른 모양이었다.

“고향 친구들이랑 연락이 갑자기 끊겼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돼요.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서 친구들, 강아지들과 뛰어놀고 싶어요.”

20일 오후 광주 광산구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고려인 5세 최즐라타양(11)이 한글 수업을 듣고 있다. 고귀한 기자

20일 오후 광주 광산구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고려인 5세 최즐라타양(11)이 한글 수업을 듣고 있다. 고귀한 기자

고향이 그리운 것은 고려인 5세 최즐라타양(11)도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 오데사지역에 살던 최양은 지난해 4월 입국했다.

최양은 5살 무렵 한국으로 돈 벌러 간 부모님을 대신해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서 컸다. 한국행도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했다.

할아버지·할머니는 한국에 온 지 약 5개월 만에 우크라이나로 돌아갔다. 최양은 광주고려인마을에 남아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포탄이 떨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던 최양은 아직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듯 했다. 당시 집 앞 100m 거리에서 포탄이 떨어졌다. 이후 최양은 차량 경적음 등 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낮선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려워하는데,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최양은 좀처럼 늘지 않는 한국어 실력을 제외하면 이 곳 생활도 좋다고 했다. 다만 할머니·할아버지가 걱정되고 그립다. 그럴 때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움은 K팝으로 달래고 있다. 최양의 휴대전화에는 아이돌 그룹 스트레이키즈 아이엔(본명 양정인)의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있다.

고려인 5세 최즐라타양의 가족 사진.  왼쪽 아버지 반발레리아씨(42) 오른쪽 최아로라이씨. 광주고려인마을 제공

고려인 5세 최즐라타양의 가족 사진. 왼쪽 아버지 반발레리아씨(42) 오른쪽 최아로라이씨. 광주고려인마을 제공

지난 17일과 20일 고려인종합지원센터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고려인 자녀 10여명은 대부분 전쟁이 불러온 비극과 한국에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 곳에 정착하려는 엄마아빠와 달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갑작스레 맞딱드린 낯선 언어와 문화.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운 것들이다.

신조야 광주고려인마을 대표는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기억과 추억이 생생해 그리움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며 “아이들이 머지않아 새로운 터전과 문화에 스며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신 대표는 다만 “아이들이 전쟁 트라우마 등으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만큼 아픔을 치유하고 잘 생활해나갈 수 있도록 심리치료 지원 등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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