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나쁜 심장’ 같아요, 순환이 안 되잖아요”

최민지·강한들·김혜리·민서영·이홍근 기자

청년 123명 인터뷰

인생을 ‘100m 달리기’에 빗대면
지방선 25m 뒤에서 출발하는 격
보고 듣는 것·만나는 사람도 차이
기회 얻으려면 서울살이 비용 내야

100m 달리기에서 누군가의 출발선이 당신보다 25m 앞에 그어져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25m.’ ‘인생을 100m 달리기로 비유할 때 서울 출신의 출발선은 몇m 앞에 있다고 생각하나’에 지방 청년들이 내놓은 답이다. 이 간격은 평생 따라잡지 못할 만큼 아득해 보이거나, 기를 쓰면 닿을 듯 말 듯한 ‘희망고문’이었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경향신문은 지난달 1~12일 만 19~39세의 비수도권 출신 청년 123명(비수도권 거주 68명, 수도권 거주 5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이 쏟아낸 이야기는 ‘기회의 격차’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돈을 밟고 서야 잡을 수 있는 서울의 ‘기회’

“수도권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이미 출발점이 달라요. 누릴 수 있는 ‘문화자본’과 ‘인간자본’에서 차이가 크니까요. 서울 출신들은 금수저, 은수저에 버금가는 ‘서울수저’ 아닌가요.” 부산에서 교사로 일하는 황경림씨(26)가 말했다. 충북의 대학을 나와 임용고시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했지만, 그에게도 서울 거주자가 누리는 특권은 커 보였다. 충남의 한 소도시 출신 통역사 이모씨(27)는 인터뷰 도중 ‘기회’라는 말을 자주 했다. 통역사가 필요한 행사들의 절대다수는 수도권, 그중에서도 서울시내 몇 곳에 몰려 있어, 고향에 머물며 통역일은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통역은 서울에서 ‘스탠바이’하고 있어야 기회를 잡는 경우가 많아요.”

전북 남원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는 공모씨(28)는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에도 높은 수준의 뭔가에 노출돼 있다는 게 서울살이의 가장 큰 특권”이라고 말했다. 대도시에서 보고 듣는 것, 만나는 사람 모두 개인의 성장을 자극한다는 의미다. 부산 출신으로 제주에서 공기업에 다니는 A씨(26)도 “실제로 뭘 얻진 않더라도 얻을 가능성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기회를 얻는 데는 돈이 든다. ‘입경(入京) 비용’이 얼마인지에 대해 월세(서울시내 원룸 기준), 생활비를 합해 100만원(월평균)을 최소 기준으로 꼽았다. 보증금을 합하면 1000만~2000만원이 추가된다. 상경한 청년들은 돈 문제 해결을 가장 힘겨워했다.

서울의 게임회사에 다니는 이다은씨(23·부산)는 “고향에 있는 대학에 다녔더라면 집 한 채는 샀을 것”이라는 말을 버릇처럼 되뇐다. 강원 태백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취업준비생 공모씨(29)는 “서울살이는 돈을 밟고 서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지방 출신이고, 지방에서 살기에 겪는 설움도 적잖이 있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서울 취업을 준비 중인 곽미경씨(27)는 지난해 코로나19 사태 초기 대구에 쏟아진 비난을 잊을 수 없다. 대구지역 신천지교회를 중심으로 감염병이 확산하자 대구·경북은 아예 ‘혐오의 대상’이 되다시피 했다. “수도권 확진자 비율이 압도적이지만 아무도 수도권을 탓하지 않잖아요. 결국 지방에 대한 차별적 시선 때문인 것 아닌가요?”

수도권 중심사고는 일상도 불편하게 한다. 코로나19로 고향 대구에 머물며 경기도의 한 대학에 다니는 홍모씨(23)는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조별 과제에 10명이 모일 때가 있었는데 3명만 서울, 나머지는 전국 각지에 있었어요. 그런데도 당연하다는 듯 서울에서 모임을 잡아요. 중간인 대전에서 만나도 되는데 거절하더라고요.”

사회 참여 기회에서 격차를 느낀다는 이도 있었다. 차민구씨(27·울산)는 “(이명박 정부 초기) 광화문은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거기 가야 대한민국 정치에 참여한다는 느낌이 들 텐데 울산에 있느라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방의 목소리는 주목받지 못하는 “고요 속 의 외침”(김재민·25·충주)일 뿐이다.

청년들은 미디어의 수도권 편향이 지방 거주자의 박탈감을 키운다고 했다. 미디어 속 배경과 기준은 수도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현우씨(21·강원 양구)는 “우리 동네 거리 두기 단계는 몰라도 서울이 몇 단계인지는 꿰고 있다. 언론이나 포털 사이트의 기준이 늘 서울이니 싫어도 자연스럽게 외워진다”고 했다. ‘여의도 면적 몇 배’로 넓이를 표현하거나, 비수도권 이슈를 다룰 때 농어촌 풍경을 등장시키는 ‘타자(他者)화’와 ‘오리엔탈리즘’에서 언론이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좋든 싫든 거쳐야 하는 ‘플랫폼 서울’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것은 수도권이 ‘플랫폼’이나 포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이 싫더라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사업은 이 인적 자본에서 탄생한다. 하버드대 에드워드 글레이저 교수도 <도시의 승리>에서 서울의 성공 요인으로 전국에서 몰린 ‘인적 자본’을 꼽았다.

고향 부산에서 프리랜서로 영상 업무를 하는 안모씨(25)는 대학 시절을 보낸 서울을 이렇게 표현했다. “비서울 인프라(지방 청년)들이 서울에 모여 서울의 가치를 높여주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가수 겸 작곡가로 세종에 거주 중인 최도원씨(23)는 서울을 사람들이 몰리는 카페에 비유했다. 두 사람은 모두 조만간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다.

강릉·고창 출신 여고 동창생 19명의 생생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인터랙티브 <지방 소녀들은 어디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한국]“서울은 ‘나쁜 심장’ 같아요, 순환이 안 되잖아요”

■서울은 ‘나쁜 심장’

청년들은 서울 입성을 성공이나 주류 사회 진입으로 여겼다. 대구 출신으로 서울의 대학을 졸업한 뒤 전남 나주의 공기업에 다니는 B씨(26)는 “서울로 올라가야 ‘그들의 리그’에 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최종 면접 전날 울었다고 했다. “붙고 싶은데 안 붙고 싶었어요. 붙으면 여기(나주)서 살아야 하니까요.”

서울만이 주류라는 감각은 지방 거주를 ‘낙오’나 ‘실패’로 여기도록 한다.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했거나 서울 진학·취업 등을 목표로 삼다 유턴한 이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금의환향이 아니라 실패해서 돌아가는 느낌”(김모씨·30·울산), “실패한 짝사랑”(권모씨·24·강릉).

황경림씨는 서울을 ‘나쁜 심장’이라고 표현했다. 자원을 빨아들이기만 할 뿐 지방과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심장이 펌프질을 해 피를 온몸에 내보내야 하는데 머금고만 있는 것 같아요. 순환이 안 되니 지방 발전은 더디죠.”

나고 자라며 고향의 쇠락을 지켜봐 온 청년들은 수도권 집중이 더 이상 지속돼선 안 된다고 했다. 공공기관 이전, 일자리 창출, 기업의 지역 이전, 미디어의 지역 보도 강화 등을 주문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불균형) 개선은 이미 불가능하다” “안타깝지만 내가 맞추는 수밖에 없다”(이효연·22·대구).

고향의 지속 가능성을 비관하는 청년들도 많았다. “이미 죽은 도시”(창원), “누가 거기(통영) 살고 싶겠냐”는 자조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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