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신 낙마’ 인사 참사

불복소송 시간 끌며 학폭 기록 세탁…‘가해자의 승리 공식’

윤기은·강은 기자

피해자들 두 번 울리는 ‘법 기술자들’

<b>국가수사본부 지휘 공백…대행체제로</b>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교 폭력 문제로 임명 하루 만인 지난 25일 사퇴한 가운데 26일 서울 서대문역 인근 도로에 켜진 신호등의 빨간불 뒤로 국가수사본부 건물이 보인다. 문재원 기자 mjw@kyunghyang.com

국가수사본부 지휘 공백…대행체제로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정순신 변호사가 아들의 학교 폭력 문제로 임명 하루 만인 지난 25일 사퇴한 가운데 26일 서울 서대문역 인근 도로에 켜진 신호등의 빨간불 뒤로 국가수사본부 건물이 보인다. 문재원 기자 mjw@kyunghyang.com

정순신도 법 지식 활용, 학폭 아들에 ‘책임 회피’ 진술서 코치
전담 로펌들 ‘성폭행 전학 처분 취소’ 등 버젓이 내걸고 영업

정순신 변호사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 낙마 사태를 두고 “아들의 학교폭력도 죄질이 나쁘지만 현직 검사였던 부친과 호화 변호인단 등 법을 잘 아는 가해자 측의 집요한 대응이 더 문제”라는 말이 나온다. 돈과 권력은 물론 ‘법적 지식’으로 무장한 가해자 측이 현행법과 제도를 이용해 시간을 끌며 처벌·징계 등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동안 피해자는 고스란히 2차 가해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26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정 변호사의 아들 정모씨에 대한 전학 처분은 교육지원청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서 전학 처분 결정을 통보한 2018년 3월부터 약 1년1개월이 지난 2019년 4월에야 확정될 수 있었다. 학폭위 처분에 대한 재심 청구부터 법원에 낸 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거쳐, 재심 처분 취소를 위한 행정소송 1·2·3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1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피해자로서는 가해자의 괴롭힘이 시작된 2017년 5월부터 대법 판결이 나온 2019년 4월까지, 고교 3년 중 2년 가까이 가해자로부터 꼼짝없이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학교폭력 예방 전문가들에 따르면, 정씨의 사례처럼 가해자 측이 학폭위 처분 결정 취소와 행정소송을 제기해 시간을 끄는 것은 “일종의 공식이 됐다”고 한다. 생활기록부를 관리함으로써 입시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나름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학교폭력 피해자 법률대리인을 맡아온 박상수 변호사(법률사무소 선율)는 “학폭위 처분 불복 소송을 대법원에까지 제기하면 3년까지도 처분 시간을 끌 수 있으며, 가해자 생활기록부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다”며 “이러한 방식이 4~5년 전부터 하나의 공식처럼 적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가해자 측 관계자의 코로나19 감염, 담당 변호사 교체·변경 등 방식으로 재판 기간을 연장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학교폭력 사건을 전담한다는 몇몇 법무법인(로펌)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학폭은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며 집행정지 신청과 불복 소송을 통해 학폭위 처분 집행을 유보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며 홍보하고 있다. 한 학폭 전담 로펌은 홈페이지 ‘가해 학생 변호’ 카테고리에 ‘교육장이 가해 학생에게 내린 조치에 대해 불복할 경우 행정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이 경우 집행정지 신청을 해 인용받아야 그 조치의 집행이 유보된다’고 적어놓았다. 판사·검사·고위 경찰 등 보유한 전문 인력을 앞세우거나, ‘출석 정지 집행정지 결정’ ‘성폭행 전학 처분 취소’ 등 승소 사례를 나열한 로펌도 있었다.

당시 현직 검사였던 정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판사 출신인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해 ‘전관급 변호인단’을 꾸려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학폭위 심의 과정부터 적극 개입했다. 2018년 6월 열린 학폭위 재심 회의록에 따르면 한 담당 교사는 “원고(정씨)가 1차 진술서를 썼는데 부모님 만나고 오면 다시 바뀌어 있는 상태”라며 “2차 진술서는 부모님이 전부 코치해서 썼다. 선도를 시도할 때마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진술했다.

학교폭력 피해 상담 실무자들은 학폭위 처분 관련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가 미뤄지면서 피해자가 학교생활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학폭위나 재판에서 내놓는 가해자 측의 진술이 피해자에게 ‘비수’로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씨는 재심 결정 취소 재판에서 “피해 학생이 주장하는 언어폭력 정도로 고등학교 남학생이 일반적으로 피해 학생과 같은 피해를 입는다 보기 어렵고, 본인의 기질이나 학업 관련 스트레스가 피해 학생의 상태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피해 학생이 지나치게 말을 길게 해서 끊은 것”이라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피해 학생은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학업을 중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선희 푸른나무재단 상담본부장은 “피해 학생들은 학폭위가 열리고 처분 결정이 내려지면 그게 이행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며 “하지만 가해자가 소송을 시작하면서 처분이 기본 6개월에서 1년은 미뤄진다. 심적으로 힘들어진 피해자는 학교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돼 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