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의 옆집물리학]평형

집을 지을 때는 판판하게 땅을 다져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다. 기둥에 가로 방향으로 올린 큰 보가 바로 대들보다. 대들보는 평형을 잘 맞춰야 한다. 수평이 맞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집이 기운다. 기둥과 함께 가장 중요한 구조물이다보니, 자랑스러운 자녀를 집안의 대들보라 비유하기도 했다. 자리를 잘 잡은 대들보처럼, 한쪽으로 기울지 않아 안정된 상태가 ‘평형(平衡)’이다. 물리학의 평형(equilibrium)도 비슷하다. 시간이 지나도 물리계가 변화 없이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면 ‘평형’이다.

[김범준의 옆집물리학]평형

책상 위에 볼펜 한 자루가 놓여 있다. 볼펜은 역학적 평형상태에 있다. 아래로 지구가 당기는 뉴턴의 중력이 있는데도 얌전히 가만히 있는 이유가 있다. 볼펜에 작용하는 힘을 모두 더하면 정확히 0이 되기 때문이다. 즉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중력과 정확히 같은 크기의 어떤 힘이 볼펜에 작용하고 있어야 한다.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에 저항하는 수직 방향의 힘이라는 뜻으로 ‘수직항력(垂直抗力)’이라 부른다. 우주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인 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중, 책상 위 볼펜에 작용하는 수직항력은 전자기력이다. 볼펜과 책상을 구성하는 원자가 서로 가까워지면 원자핵 주위의 전자가 먼저 만난다. 이들 전자는 쿨롱의 전기력으로 서로 밀어내고 결국 책상이 볼펜을 위로 미는 수직항력을 만들어낸다. 책상 위 가만히 놓여 있는 볼펜처럼, 물체가 역학적인 평형상태에 있으려면 작용하는 힘이 서로 비겨 힘의 총합이 0이 되어야 한다. 비김은 평형의 필요조건이다.

사람들을 둘로 나눠 줄다리기를 할 때, 양쪽의 힘이 비기면 줄은 옆으로 움직이지 않고 평형을 유지한다. 꼼짝하지 않는 줄만 쳐다보는 사람은 양쪽에서 줄을 당기는 많은 사람들의 안간힘을 눈치 채기 어렵다. 상황이 안정된 상태로 유지된다 해서 노력을 멈춰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안심해 노력을 멈추는 순간 힘의 비김이 어긋나 평형상태에서 벗어난다. 겉으로 보기에 평화로운 상황이어도 그 속내는 다를 수 있다. 평화로운 겉모습의 이면에는 수많은 힘이 서로 비기고 있다.

하루하루 큰 변화 없이 되풀이되는 우리 삶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기사님이 운전하는 버스를 타고 직장에 도착해, 일찍 청소를 마친 분들 덕분에 말끔해진 건물에 들어선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은 눈에 띄지 않는 많은 이의 안간힘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중국집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앞에 놓고는 이것이 얼마나 기적같이 감사한 일인지 깨닫고 전율한 적이 있다. 무엇 하나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필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지 돌이켜보기도 했다. 우리 삶의 평화로운 매일의 일상은 함께하는 모두의 연결된 안간힘의 결과다. 오늘 하루 무사했다면 모두에게 감사할 일이다.

물리에 평형이 있다면 생명에는 항상성(homeostasis)이 있다.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난다. 우리 몸의 근육은 ATP 분자에 담긴 화학적 에너지를 역학적 일로 바꾼다. 휘발유에 들어 있는 화학적 에너지를 이용해 차를 움직이는 자동차 엔진과 비슷하다. 우리 몸의 근육이 역학적 일을 할 때는 열도 함께 발생해 체온이 오르고, 체온을 다시 내리기 위해 우리는 땀을 흘린다. 자동차가 냉각수와 라디에이터로 하는 일을 우리는 땀으로 하는 셈이다. 액체인 땀이 피부에서 기체로 변하는 과정에서, 물 분자 사이 연결의 사슬을 끊기 위해 상당히 큰 에너지(기화열)가 필요하다. 땀이 피부에서 증발할 때 주변에서 큰 에너지를 흡수하니, 이 과정을 이용해 우리는 체온을 낮출 수 있다. 더운 날 온몸이 털로 덮인 강아지가 물기로 촉촉한 혀를 입 밖으로 내밀어 헉헉 거리는 것도 똑같은 이유다. 혀의 수분을 증발시켜 체온을 낮춘다. 추운 날 몸이 저절로 떨리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몸을 떨면 근육에서 열이 나 체온이 오르기 때문이다. 체온이 오르면 내리는 방향으로, 체온이 내려가면 올리는 방향으로, 변화를 거꾸로 돌이키는 음의 되먹임(negative feedback)을 이용해 우리는 항상성을 유지한다.

우리 몸의 항상성이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버틸 수 있는 한계보다 더 큰 변화가 생기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그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생명의 죽음이다. 잠깐은 숨을 참을 수 있지만, 한 시간을 숨 못 쉬면 우리는 죽고, 오랫동안 물을 못 마셔도, 음식을 먹지 못해도, 체온이 너무 높아도, 너무 낮아도 죽는다. 항상성이 작동하는 한계 안에서만 우리는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살아있음의 특징이 항상성이고, 항상성의 비가역적 깨짐이 죽음이다.

맑은 호수에는 햇빛이 잘 통과해 수초가 울창하다. 여러 곤충과 물고기가 수초와 함께 살아가며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한다. 어느 정도의 유기 오염물질이 호수에 유입되어도 이를 분해할 수 있는 생태계가 잘 갖춰져 있어 호수는 맑은 물을 유지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로 물이 혼탁해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햇빛을 받지 못해 수초가 죽어 사라지면, 수초에 기반해 삶을 이어가던 많은 생물종도 함께 사라진다. 이렇게 한번 혼탁해진 호수는 오염물질의 유입이 멈춰도 다시 맑아지기 어렵다. 오염물질을 분해할 생태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항상성이 깨지면 생태계도 병든다.

오랜 기간 큰 변화가 없던 지구의 기후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변하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물리학의 역학적 평형에서 힘의 비김이 깨지면 물체는 가속도를 갖게 되어 속도가 점점 늘어난다. 음의 되먹임으로 유지되던 지구의 기후도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면 양의 되먹임으로 폭주한다. 기온이 오르면 기온을 낮추는 방향이 아니라 거꾸로 기온을 더 오르게 하는 메커니즘이 촉발된다. 역학적 평형을 유지하려면 세심한 힘의 비김이 필요하듯이 지구의 항상성을 위해서도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의 안간힘만이 지구를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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