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의 정체성, 진보의 정체성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의 낯선 사이]검사의 정체성, 진보의 정체성

오독을 우려하는 심정에서, 서두에 이 글의 요지를 분명히 하고 싶다. 이 글은 이념과 직업에 근거하여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정체성의 정치를 비판한다. 특히 이 문제는 현 정권에서 많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선, ‘윤석열 X파일’은 존재와 사실 여부를 떠나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X’니 ‘파일’이니 하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검증보다는 추측과 대립만 양산할 뿐이다. 매체들은 다른 표기를 고민하기 바란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인간은 누구나 흠결이 있다. 다만, 공인일 경우 그 흠결의 내용과 수위는 사회적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하 ‘윤석열씨’)도 결점이 있을 것이다. 그의 단점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살아온 이력, 가치관, 능력 등의 총체로 ‘현재 윤석열’을 구성하는 일부일 뿐, 특별히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의 결함이 대통령으로서 아니 대통령 후보로서 수용할 만한 내용인가 여부다.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불법 행위 등 문제가 많았지만, 국민은 압도적으로 그를 선택했다. 당시 유권자의 의식에서는 수용할 만한 단점이었던 것이다.

나는 1년 전에 윤석열씨의 사연을 들었다. 그 내용이 ‘X파일’과 동일한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게 그 이야기를 해준 이들의 성별, 나이, 직업군 등 사회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는 점은 고려할 만하다. 윤씨 부인의 영어 이름부터 관련자들의 실명도 언급되는데, 이후 포털사이트에 관련 기사가 날 때마다 댓글 내용을 보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아는 것 같다. 오래된 얘기라는 뜻이다.

그의 문제가 “방어할 수 없는 수준이다” “공작정치다”라는 대립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이 글의 관심은 사연의 수위, 사실 여부라기보다는 그 이야기를 관통하는 자연인 윤석열의 직업 개념을 중심으로 한 정체성이다. 아무리 사연을 덜어내도, 분명한 점은 그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같은 피해(?)를 입은 후배 검사들과는 달리 직업을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 그에게 ‘검사’는 자신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직업·가치관은 정체성 될 수 없어
검사와 진보 세력의 정체성의 정치
이번 정부에서 극단적으로 충돌

“나 검사야” “나 진보야” 다음 말은
“누가 감히 나를 건드려?”
사회가 이들 자아 결투장 돼선 안 돼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겠지만 구조적 차원에서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 출발했다. 두 가지. 2년간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 사태.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인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다. 정체성의 정치는 피해를 받았다는 자각에서 구성되는데,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문화에서 남을 해치지 않는 유일한 도덕적 주체는 피해자뿐이기 때문에 모두가 “내가 더 피해자, 내가 가장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었다(부동산 이슈에 대한 소위 ‘있는 사람들’의 피해 의식을 보라).

이번 정부에서 기득권층이면서도 피해자라고 주장함으로써 윤리성까지 갖고자 한 대표적인 집단은, 일부 진보 세력 출신 관료와 검사 집단이다. 전자는 보수 세력의 피해자, 후자는 정권의 피해자라는 주장은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이념 정체성의 정치’와 건국 이래 군(軍)과 함께 시민 감시(civil control)의 마지막 영역으로 남아있는 검찰의 ‘직업 정체성의 정치’가 극단적으로 충돌했다. 더구나 소송사회로 진입하면서 법조계 전반과 검찰의 위상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기에, 우리는 매일 ‘정권으로부터 억압받는 검사들의 분노’와 만나야 했다.

정체성(正體性)의 정치(identity politics), 즉 동일시(同一視)의 정치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공동체와 관계 맺는 중요한 방식이다. 계급, 인종, 젠더 등 구조적으로 형성된 피억압 집단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나는 누구다”라고 자신을 설명하는 사고방식이다.

대표적인 정체성의 정치는 민족주의와 여성주의다. 민족주의는 부족, 소수민족을 강제로 통합하여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가능케 한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상상의 공동체’). 여성주의는 인구의 반이 문명의 시작과 함께 종속되어 왔기에, 여성의 정체성 자각은 어느 사회에서나 큰 변화를 가져온다. 물론 여성, 민족, 흑인, 장애인, 해병대 등 모든 정체성은 동일한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동일시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정체성의 정치는 실현 불가능하다. 정체성의 정치가 의미를 가질 때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민족주의나 퀴어나 여성 같은 사회적 소수자, 약자가 저항할 경우뿐이다. 정체성은 상황에 따른 맥락적 개념으로 약자에게만 의미가 있다. 게르만민족, 시오니즘, 백인 정체성처럼 강자의 정체성은 악의 뿌리다.

한편 한국 사회에는 다른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유난스럽고 위험한 정체성의 정치가 있다. 생계인 직업과 진보(혹은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자부심)를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 이들이다. 당연히 이 둘은 정체성이 될 수 없다. 소위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본질’과 직업을 분리한다. ‘노숙자님’이라는 말도 없다. 그러나 법조계 종사자나 의사, 교수, 국회의원 중에는 직업으로 자신의 삶 전부를 평가하고 평가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변호사님, 의사 선생님, 의원님은 모두 지칭으로 어법상 맞지 않지만 이들은 그렇게 불리길 원한다.

윤석열씨의 가장 큰 문제는 검사 정체성이 그의 생애와 영혼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데 있다. 검사가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가리지 않고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이를 오해한 문재인 정권은 윤석열씨를 고속 승진시키며 검찰총장으로까지 발탁했다. 그가 국정농단 사건과 사법 행정권 남용 등 이른바 적폐 사건의 수사를 지휘한 사실을 정의와 도덕성의 징표로 착각한 것이다.

그는 단지 검사로서 ‘신나게’ 일했을 뿐이다. 대신 자신의 검사 정체성을 건드리는 세력은 누구든 가만두지 않는다. 그는 절대로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항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살아 있는 권력도 자신의 검사 정체성과 비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물론 그의 칼춤에 보수 언론과 태극기부대가 함께했다.

영화 <내부자들>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의 정치, 언론, 검경의 카르텔과 협상을 그린 텍스트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그중 <괴물>이라는 드라마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선배 형사가 후배에게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이 작두를 잘못 타면 발목만 다치지만, 다른 사람은 모가지가 날아간다.” 나는 이 대사를 법조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공유했으면 한다.

가치관은 더더욱 정체성이 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든 페미니즘이든 채식주의든 합리적 보수주의든, 이는 개인이 추구하는 세계관의 일부일 뿐이다. 때로는 충돌하거나 모순적이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페미니스트이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향할 뿐이다. 그 때문에 남들이 ‘나’를 “~주의자”로 불러도 불편하고 민망한 판에, 스스로 “난 좌파야” “난 민주화운동을 했어”라고 나대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여야 학생운동권 출신 중 실제로는 아무 활동도 안 한 이들조차 있다. ‘진보 경력’은 개인의 자부심 혹은 과거의 조작된 기억의 산물이지 팩트가 될 수 없다.

진보는 관점이지 사람이 아니다. “~주의자”라는 인식과 실천에는 누구나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진보는 자기 선언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보고 타인과 사회가 판단하는 것이다. 자신은 진보라고 생각하지만, 남들은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시대 우울증의 원인 중 하나는 패거리로 몰려다니면서(‘네트워킹’) 부패를 공모하는 이들의 진보 정체성의 정치다.

미국 이야기이긴 하지만 환경운동가 앨 고어는 화장실 여덟 개, 방 스무 개짜리 맨션에 산다. 1년 전기료가 2700만원으로 미국 일반 가정의 10배가 넘는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도 페미니스트를 포함하여 그런 진보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강남 좌파가 아니다. 권력에 취해 부패한 변절 진보 카르텔일 뿐이다.

“나, 검사야” “나, 진보야” 이런 자의식 다음에 오는 말은 “누가 감히, 나를 건드려?”이다. 직업을 자기 정체성의 전부로 생각하는 행위는 신분주의이고, 가치관을 정체성으로 착각하는 이들은 스스로 위선자임을 선택한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들의 자아 결투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보라면, 자기 자리에서 신념에 맞게 살면 된다. 한편 ‘고위 공직자’라는 직업 도취증 외에는 능력을 알 수 없는 이들의 대선 출마는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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