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웃은 날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갓난아기는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많다. 사람만이 아니라 아기 노루도 마찬가지다. 눈을 뜨고 세상을 보는 일은 조금 더 준비가 된 뒤에야 가능하다. 동화 <밤비, 숲속의 삶>의 첫 장면도 그렇다. 엄마 노루는 배 속에서 방금 태어난 아기 노루 밤비가 눈을 뜰 때까지 얼굴을 핥아주고 또 핥아준다. 밤비가 일어서는 연습을 할 때도 그렇다. 다리를 펴서 조심조심 땅을 짚어볼 때, 어깨와 목을 들어서 어떻게든 혼자 서보려고 할 때, 엄마 노루는 턱으로 끊임없이 밤비를 도닥여준다. 밤비는 서자마자 쓰러진다. 그때 엄마 노루는 말하고 또 말한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 밤비. 엄마는 널 믿어.” 밤비는 마침내 혼자 일어서고 엄마 노루에게 살짝 웃음을 짓는다. 그날이 밤비가 처음으로 웃은 날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밤비>의 원작은 1922년 빈의 한 신문에 연재되었던 <밤비, 숲속의 삶>이라는, 펠릭스 잘텐의 소설이다. 야생동물의 생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당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두 다리만 사용하면서 가끔 세 번째 다리를 들어서 불을 뿜어대는 사냥꾼은 밤비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작가는 밤비의 눈을 빌려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폭력성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히틀러는 그의 작품을 모두 금서로 지정한다.

잊혔던 <밤비>가 다시 호명된 적이 있다. 2018년 미국의 한 법정이었다. 캔자스, 네브래스카, 미주리주를 오가며 사슴 수백 마리를 밀렵했던 데이비드 베리가 체포되었는데 그는 커다란 뿔을 가진 사슴을 골라 죽이고 머리만 취한 뒤 몸통은 버렸다. 이렇게 오락처럼, 야생동물을 죽이는 행위를 ‘트로피 사냥’이라고 부르는데 트로피 사냥꾼들이 우두머리 동물만 골라 죽이는 바람에 군집 전체가 멸종하기도 한다. 당시 법원은 데이비드 베리에게 벌금과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교도소 안에서 애니메이션 <밤비>를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1년간 <밤비>를 강제 시청하라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함을 모르면 징역을 마쳐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최근 가슴 아픈 뉴스와 마음이 놓이는 뉴스가 있었다. 아픈 뉴스는 지난 6일 경기도의 곰 사육농장에서 반달가슴곰 두 마리가 탈출해 한 마리는 사살되었으며 한 마리는 실종 상태라는 기사였다. 반달가슴곰은 멸종위기종임에도 웅담, 피 등이 거래됐다. 한때 농가 소득 창출용으로 사육이 권장되기도 했다. 1993년 무역제한 조치가 시행되었지만 이미 들여온 곰들은 방치된 상태였고 국내에 약 398마리의 사육곰이 있다고 한다. 구조단체인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는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생크추어리(sanctuary)를 마련해 곰을 옮기는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다행스러운 뉴스는 양육자 없이 시설에서 생활해온 보호종료아동에 대해 정부가 지원을 강화하기로 했다는 얘기다. 현재는 만 18세가 되면 정착금 500만원을 들고 무조건 시설에서 나가야 한다. 그런데 지난 13일 정부가 발표한 지원방안에 따르면 본인의 의사에 따라 만 24세까지 시설에 머무를 수 있다. 자립수당 지급기간도 3년에서 5년으로 늘리고 공공후견인 제도를 고려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가족의 지지 없이 야생의 숲에서 자립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힘이 되는 소식이다.

그림책 <밤비, 숲속의 삶> ‘겨울’ 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엄마는 어디서 먹이를 구할 수 있는지, 풀뿌리라도 찾으려면 쌓인 눈을 어떻게 파헤쳐야 하는지 가르쳐주었어요. 먹을 것 걱정 없던 시절이 오래전 일 같았지요.” 엄마가 있어도 밤비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숲의 겨울은 이렇게 무섭다. 보호는 종료되지만 자립은 두렵지 않도록,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구체적인 지원대책이 반갑다. 당신을 믿는다고 응원해주는 사회적 후견인들의 목소리도 더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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