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 위한 호칭문화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한국 사회에서 호칭을 적절히 구사하는 일은 어렵다. 서로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말문을 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흔히 쓰이는 호칭은 대개 가족 관계나 직업 또는 직급을 나타내는 명칭들이다. 형님, 언니, 이모, 아저씨, 아주머니, 사장님, 부장님…. 잘 모르는 성인 남성에게 가장 만만한 호칭은 ‘사장님’이다. 자영업 전성시대에 어울리는 호칭문화인 셈이다. ‘아주머니’보다 격을 높인 ‘여사님’이나 ‘사모님’은 사장님만큼 보편적으로 쓰이진 않는다. ‘사모님’은 원래 스승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호칭인 만큼 격에 안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아저씨’ ‘아주머니’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은 부모 외의 어른이 모두 아저씨, 아주머니인 씨족사회 문화의 유산일 것이다. ‘선배’는 근대학교가 생겨나면서 정착된 호칭으로 보인다. 학교에서는 선후배 관계도 상당히 위계적이지만, 직장문화가 권위적이지 않은 곳에서는 상사를 ‘선배’라 부르기도 한다. 한 방송국에서 신참 기자가 사장을 선배님이라 부르는 모습은 꽤 신선한 인상을 주었다.

사회 민주화와 더불어 호칭문화도 바뀌고 있다. 대통령을 ‘각하’라 부르던 시절은 일찍이 끝나고 이제는 각하 호칭이 희화화되기에 이르렀다. 판검사를 일컫는 ‘영감님’도 사라지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 속에 배어 있는 서열의식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만큼 깊다. 나이가 곧 권력이 되는 문화는 거의 한국인들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는 존댓말 못지않게 호칭이 한몫한다.

우리말에 형, 누나, 오빠, 언니처럼 손위 형제를 부르는 호칭이 세분되어 있는 데 반해 손아래는 그냥 ‘동생’뿐이다. 게다가 ‘동생’은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손아래를 가리키는 지칭이다. 형은 동생을 이름으로 부르는데 동생은 형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몇 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조차 형·아우 관계를 따지면서 형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한다. 이런 문화는 형제들끼리 서로 이름을 부르는 서구인들 눈에는 매우 이상하게 비친다. 일본만 해도 동생이 형이나 언니 이름을 곧잘 부른다. 형제 사이의 호칭 불균형과 서열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장자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을 것이다. 가부장제는 남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구속하는 장치인 셈이다. 형제간의 이러한 서열은 학교에서 선후배 간의 서열로 복제되어 나타난다. 일 년 선배도 반드시 ‘선배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존댓말을 쓰게 하는 문화는 학교의 민주화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중국어는 영어와 비슷하게 존댓말이 따로 없다(Mr에 해당하는 호칭은 ‘선생’이다. ‘님’자는 붙이지 않는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글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자어를 고수하며 중국 문화를 우러러보았으면서 중국어의 평어체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존대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지위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처럼 사회주의 체제를 이룬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등을 사회의 근간으로 함에도 ‘동무’와 ‘동지’를 구분해 호칭에서부터 서열을 만들어냈다(자기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은 ‘동무’가 아니라 반드시 ‘동지’라 불러야 한다). 문화의 관성은 혁명으로도 잘 바뀌지 않는다.

많은 기업들이 호칭문화를 바꾸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다가도 불편해하는 이들이 많아 예전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어린 시절 가정과 학교에서 몸에 밴 문화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호칭이나 존댓말 같은 언어는 삶 속에서 몸에 각인되기 때문에 어색한 상황에서는 몸이 먼저 불편함을 느낀다. 예민한 이들은 피부가 따끔거리기도 한다. 언어의 신체성을 간과한 셈이다. 집에서 형제들끼리, 학교에서 선후배끼리 이름을 부르며 말을 놓는 문화를 몸으로 경험한 아이들이 자라서 만드는 사회는 다를 것이다. 언어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먼저 가정과 학교의 문화를 바꾸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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