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K방역을 망가뜨렸나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지난달 영국 콘월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문 대통령은 즐거운 듯 웃는 표정을 짓고 있어 화제가 된 사진이 있다. 존슨 총리가 “정말 한국은 방역에서 세계 1등”이라고 하자 뒤편에 있던 유엔 사무총장과 프랑스 대통령까지 가세해 “한국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는 장면이었다고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라디오에 나와 설명했다. 이른바 ‘선진국 클럽’에 초대돼 K방역에 대한 찬사를 한 몸에 받은 문 대통령은 귀국 후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과 국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은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나라가 됐다”고 했다.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이주영 정책사회부장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이를 전후로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여당 내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방역에 대한 자신감 충만을 넘어 코로나19 국면이 다 끝난 것 같은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문 대통령의 유럽 순방에 동행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트래블 버블’(방역신뢰국가와 단체여행객 격리 상호면제) 추진 계획을 밝히며 “부처별로 국민 일상이 회복되는 아이디어를 다 내보자는 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마스크 없는 일상이 머지않았다”며 여름휴가 전이나 추석 전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교육부는 2학기 전면 등교 방침을 내놨다. 문 대통령이 “올해 추석에 적어도 가족들끼리는 마스크를 벗고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라고 말한 뒤 ‘추석 노(NO) 마스크’는 지상 과제가 됐다. 아직 백신도 맞지 못했는데, 이렇게 풀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하루 신규 확진자가 500명을 밑돌고 백신 접종이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니 조만간 집단면역에 도달할 것이란 전망에 근거한 낙관론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때는 이미 영국, 이스라엘 등 접종률이 높은 나라에서 델타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았다. 속도를 내는 듯했던 백신 접종 역시 다시 ‘보릿고개’를 맞았다. 정부는 정상외교를 통해 한국을 글로벌 백신 생산기지로 구축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홍보했지만, 정작 국민들이 맞을 백신은 접종 일정을 간신히 맞추는 수준으로 들어오고 있다.

정책적 오판 자체도 문제지만, 갑작스레 확 바뀐 정부의 방역 완화 시그널이 100% 과학적 분석에 기반한 것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완화된 거리 두기 개편안에 대해 전문가들은 휴가철 풍선효과 등을 우려해 도입 시기를 늦출 것을 권고했지만 정부는 이를 외면했다. 확진자가 하루 1500~1700명씩 쏟아져나오는 지금, 전문가들은 더 강력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정부는 누더기가 돼버린 거리 두기 개편안을 붙잡고 ‘뒷북 방역’을 되풀이하고 있다. 전국이 일일 생활권인데, 마치 각 지역이 고립된 섬인 듯 제각각 설정한 거리 두기 단계와 사적모임 가능 인원을 보노라면 쓴웃음만 나온다. ‘봉쇄 없는 방역 성공’이라는 K방역 성과에 대한 집착과 내년 대선을 의식한 조급증이 4차 대유행 대응에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그렇지 않다고? 단적인 예로 이런 일로 있었다. 정부가 상정하는 집단면역 달성 시점을 9월부터 11월까지를 포괄하는 ‘가을’로 표현하느냐, 마지노선인 ‘11월’로 표현하느냐를 두고 정치권 출신인 ‘어공’(어쩌다 공무원)들과 ‘늘공’(늘 공무원)들 간 실랑이도 있었다고 한다. ‘가을’로 하자는 어공들 주장에 늘공들이 난색을 표했다고 회의 참석자는 전했다. 방역을 정치적 성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섣부른 방역 완화 책임론에 대해 정부는 경제적 피해 최소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방역보다 경제를 앞세운 메시지 자체가 정무적 판단이 개입된 결과다. 델타 변이 감염자가 속출하고 백신 효과가 얼마나 되느냐가 관심사로 떠오른 지금으로서는 11월도 쉽지 않아 보인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마치 지능이 있는 것 같아요. 확진세가 가라앉아 한숨 돌릴 만하면,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다시 기승을 부리더라고요.”

방역 최일선에서 분투했던 한 고위관료가 최근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변이 바이러스 확산, 백신 수급 차질, 느슨해진 방역 긴장도 등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K방역에 대한 과도한 우월감과 자만심, 과학적 사고를 압도한 정치적 판단 등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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