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갈 개고기의 시간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어릴 때 빈혈기가 조금 있다는 진단을 받자마자 아버지는 마장동에서 물컹하고 이물스러운 고깃덩어리를 사왔다. 그게 ‘지라(소의 비장)’였다. 아버지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숫돌에 칼날을 벼려 지라를 썰어 내게 먹였다. 울고불고 안 먹는다 난리를 피웠지만 아버지는 단호했고 절실했다. 철분제도 먹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싶었던 모양이다. 농촌 출신 1940년대생 아버지의 1980년대풍 처방이었다. 이름만큼 이물스러운 지라의 맛에 비위가 상했지만 아버지의 절대 사랑만큼은 사는 내내 힘이 되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문재인 대통령의 개식용 금지에 대한 발언을 고갱이 삼아 여기저기 뜨겁다. 동물권 운동단체들은 오랫동안 개식용 금지를 법제화하려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으므로 크게 환영하고 있고, 식용 용도의 개를 기르고 파는 육견업계는 반발하고 있다. 대선을 앞둔 ‘정치의 시간’인 지금 각당의 대선 예비후보들은 일제히 환영하는 분위기다. 소위 반려동물을 기르는 반려인들의 ‘펫심’을 잡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지만 정치인들도 동물에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다. 최근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들이 앞다퉈 반려동물과 관련한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이란 말이 보편의 호칭이 된 지금은 동물은 민법상 물건이 아닌 생명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얻기 직전이다. 동물을 함부로 다루면 생명을 해하는 일과 같아 그에 따른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 20년 전만 해도 개고기 유통의 합법화 문제를 고민하던 나라에서 보폭을 크게 내디딘 부문이 동물권 담론이다. 한국은 분명 고기를 많이 먹는 나라다. 그에 따른 폐해야 중언하진 않겠다. 심지어 개고기도 먹는 나라지만 개고기 소비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1988년 올림픽 전후로 보신탕집들이 후미진 골목으로 떠밀린 데다 개 말고도 먹을 수 있는 합법적 고기가 넘치는데 개고기까지 눈총받으며 먹는 이들은 확연히 줄었다. 최근 몇 년간 유통업체의 매출 현황을 보면 복날에 삼계탕보다는 해산물이 더 많이 팔린다. 복달임 음식으로 삼계탕의 지위도 약해지는 마당에 개가 복날 음식의 지위로 남아 있을 시간은 길지 않다. 동물단체들은 한 해에 개 100만마리가 유통되며 여전히 많이 먹는다지만 SBS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추정치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라 한다.

그동안 개고기는 합법도 불법도 아닌 상태에서 관행대로 소비되어온 탓에 실태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보신탕집도 오리탕이나 삼계탕 같은 다른 보양식도 병행해서 팔고 있어 업태가 선명하지 않다. 지역마다 업력이 30~40년이 넘는 유명 보신탕집이 있는데 신규진입이 거의 없는 업종이다 보니 자연스레 노포가 된 곳들이 있다. 여기에 간판 걸고 떳떳하게 장사하기가 쉽지 않아 장사를 접거나 전업을 하면서 줄어드는 것만은 분명하다. 보신탕집이 몰려있던 청량리 뒷골목에도 이제 여남은 곳만 남았다. 노포의 전성시대에 냉면집은 3대 사장까지 나오지만 보신탕집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 모욕을 누가 물려주고 물려받겠는가. 개고기 식용에 대한 의사가 현격히 줄어든 이때 개고기 식용 금지의 법제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고 이제 전문가의 영역으로 넘어갈 것이다. 조직화된 육견협회는 목소리라도 낼 수 있지만 산재되어 있는 저 작은 보신탕집들의 신세는 더욱 궁색해질 것이다. 그런 가게의 주인들과 아직도 몸을 보하는 데는 개가 최고라 여기는 아버지 또래의 노인들에게 위법의 딱지를 붙일 수 있을까.

난데없는 개식용 논란을 보면서 40대의 아버지가 내게 지라를 먹이려던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던 아버지가 얼마전 본인이 먹어보니 좋더라며 글로벌제약회사에서 파는 종합영양제 한 통을 내게 쥐여주었다. 이렇게 팔순 아버지의 지라의 시간도, 보신탕의 시간도 소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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