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딤에 대하여

오은 시인

퇴사를 결심한 친구를 만났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 부러진 음절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10년을 넘게 다니며 좋은 기억도, 힘든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사이 그는 두 번의 승진을 했고 부서와 업무가 달라지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일했다.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의 생활은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중에 만나면 회사에서의 고단한 노동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주말에 만나면 그의 입에서 다음주에 치러내야 할 업무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에게 회사는 단순히 밥벌이 수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처음에 나는 그의 말에 쓰인 ‘견디다’란 단어를 첫 번째 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생물이 일정한 기간 동안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거나 죽지 않고 계속해서 버티면서 살아 나가는 상태가 되다”라는 의미 말이다. 이때 견딤에서 가장 중요한 속성은 바로 버팀일 것이다. 어려운 일이 찾아와도 참는 것, 주위 환경이 여의치 않아도 굽히지 않는 것, 외부의 압력을 어떻게든 이겨내는 것 말이다. 마음가짐이 중요할 텐데, 몸이 고되면 자세는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사직서를 낼 때, 미련 또한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으련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친구는 당분간 쉬겠다고 말하면서도 아쉬움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었다. 일이 그렇게 힘들었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단순히 힘든 차원이 아니야. 어느 순간에는 내가 누구인지 나조차 모르겠더라.” 그때 친구의 몸은 흡사 액체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흘러내릴 것 같아 어깨를 토닥이는 손에 차마 힘을 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견디다’의 두 번째 의미인 “물건이 열이나 압력 따위와 같은 외부의 작용을 받으면서도 원래의 상태나 형태를 유지하다”를 떠올렸다. 비단 물건뿐이랴, 사람 또한 열이나 압력 같은 외부 작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곳은 낯설기 때문에 주눅 들고 익숙한 곳은 정들었기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원래의 상태나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새로운 곳이 익숙한 곳이 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해당 장소(조직)에 심신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사회생활이고 조직 문화이고 공동체 정신이라고 배웠으니까.

말을 아끼다 친구에게 다가오는 주말에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당장 계획이 있냐는 물음은 이제 막 회사를 그만둔 이에게 부담이 될 것이다. ‘쉬는 동안’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면 조바심을 자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제야 친구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골똘히 궁리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그다웠다. 학창 시절, 주말이면 산에 오르거나 바다를 향하는 친구였기에 아마도 이 휴식이 어느 정도는 반가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가야지. 가까운 데로.” 자가용을 가지고 회사와 집만 오가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그는 덧붙였다. 액체에서 다시 유기체가 된 그를 보고 안도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견디고 있다. 견디다 앞에 흔히 쓰이곤 하는 ‘묵묵히’라는 부사는 호수 위를 유영하는 오리를 떠올리게 한다. 겉으론 태연한 듯 보이나 수면 아래서 오리는 발을 재빠르게 움직이며 부단히 헤엄치고 있다. 말없이 잠잠한 듯 보이나 오리의 속은 바쁠 것이다. 애가 끓다가 타고 종래에는 마르고 마는 시간일 것이다. 마침내 속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호수 위의 오리와 땅 위의 우리가 겹쳐 보일 때마다 나는 매일 어떤 식으로든 견디고 있음을 깨닫곤 했다.

친구는 스스로를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생활에 치이는 일은 나 자신이 희미해지는 일일 테지만, 언제 어디에 있든 원래의 모습을 잃지 않은 채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은 ‘살아 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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