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사극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로맨스사극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궁녀들의 옷소매 끝동이 붉은 것은 그녀들이 왕의 여인이라는 증표다. 언뜻 애틋한 로맨스적 정서가 먼저 연상되지만, 그것이 내포한 의미는 사뭇 양가적이다. 궁녀들은 달에 사는 선녀를 뜻하는 ‘항아’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존재로 칭송받는 한편, 궁에 속박되어 웃전의 운명에 의해 좌우되는 종으로도 취급받았다. 이를 제목으로 삼은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역시 낭만적인 궁중 로맨스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규범적 복장에 갇힌 역사적 인물들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작품이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배경은 영·정조 연간, 흔히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궁중 사극들이 극적인 왕실 가족사와 정치 투쟁에 초점을 맞춘 점을 생각할 때, <옷소매 붉은 끝동>의 시선은 매우 흥미롭다. 정조와 의빈 성씨의 유명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궁중 로맨스를 표방하면서도, 전형적 장르의 한계에 갇히지 않은 신선한 관점이 돋보인다. 극중 정조(이준호)의 캐릭터 묘사부터가 그러하다. 그는 기존 사극 속의 익숙한 개혁군주로서 면모보다는 군왕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흔들리는 청년 이산으로 그려진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5회, 영조(이덕화)로부터 금족령 징계를 받고 난 뒤의 처절한 심정 고백신이다. 세손이 기방 출입을 한다는 소문이 돌자 분노한 영조는 이산의 해명도 듣지 않고 “절대 네 아비 같은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며 폭언과 폭력을 행사한다. 그저 이를 악물고 할아버지의 학대를 묵묵히 견디던 이산은 그가 떠나간 뒤 문밖을 내내 지키고 있던 덕임에게 피를 토하듯 말한다. “이루고 싶은 것이 있어 참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견디는 것이다. 난 고통이 무엇인지 알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는지도 안다. 난 이 나라의 왕세손이야. 나에겐 언젠가 힘이 생겨. 그 힘으로 수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고 사는지 네가 아느냐?”

이산의 이 절절한 심경 고백은 덕임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향한 독백과도 같은 성격을 강하게 띤다. 그는 군왕이 될 신분이기에 다른 이에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연약한 면모를 보여서는 안 된다. 드라마는 흡사 뒤주 안에 갇힌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폐쇄되고 고독한 공간에 발이 묶인 이산의 심리적 그늘을 드러내는 연출을 통해, 그의 터져나갈 듯한 고통과 한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산 위로 층층이 드리운 삶의 무게를 단적으로 묘사한 명장면이다.

이 장면은 또한 성덕임 캐릭터의 탁월함과도 연결된다. 이산의 처절한 속내를 듣고 난 덕임은 “세손의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어명을 ‘감히’ 어기고 그의 방 안에 들어선다. 경악하는 이산 앞에서 그는 “반드시 전해야 할 마음이 있어 어명을 어겼다”고 담담히 말한다. 그리고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저하를 지켜드리겠다”고 맹세한다. 말을 마치고 손을 모아 절하는 덕임의 얼굴 위로 옷소매의 끝동이 유난히 붉게 빛난다. 제일 가까운 자리에서 동궁을 보필하면서도 그의 얼굴조차 바로 보아서는 안 되는 “한낱 궁녀”가, 무려 어명을 어기고 궁궐의 엄격한 법도를 뛰어넘어 마음을 전하는 이 장면은 사극 사상 가장 혁명적인 장면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산과 덕임이 마주 선 이 장면은, 또한 두 사람이 단지 로맨스로만 얽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도 교감하는 관계임을 드러낸다. 궁녀의 신분으로 궐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덕임, 그리고 사사로운 감정을 모두 배제한 채 좋은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려 있는 이산의 처지는 크게 보면 유사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그 예정되고 제한적인 운명 안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두 청춘의 절절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그동안 많은 궁중 로맨스는 가상의 시대적 배경을 설정해 고증의 부담을 덜어내고 판타지적 성향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유연한 상상력을 통해 오히려 실제 역사의 여백을 더 풍성하게 채우고 실존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로맨스 사극에 대한 편견을 깨부순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지금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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