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범죄’가 예술가들을 저격했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칼에 찔려 죽을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습니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극단 ‘마실’ 손혜정 대표의 고통스러운 호소다. 그는 2015년에 공공기관인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공모사업에 신청했었다. 뉴욕 문화원에서 순회공연을 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예술경영지원센터’ 직원으로부터 ‘최종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공연을 위해 영문 번역 등에 들어갔다. 하지만 심사결과 발표가 지연되더니, ‘뉴욕 문화원 공연 지원 사업’ 폐지를 알리는 최종 통보가 왔다. 당시 손혜정 대표는 3개월여 동안 ‘도대체 왜 제외되었는가’에 대해 용기를 내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었다. 하지만 개인이 기관을 상대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손혜정 대표는 2017년에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활동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국가정보원이 문체부에 선별 통보한 181명’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정보원·문체부 같은 국가 기관이 문화예술인에 대한 특정 명단을 작성하고, 이를 광범위한 차별과 배제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이전과 이후를 “컬러사진에서 흑백사진으로 바뀌는 장면”에 비유했다. 손혜정 대표는 세상 전체의 풍경이 바뀌는 것과 같은 충격을 경험했다. 그의 예술 작업도 ‘해외 문화 교류 공연’에서 ‘커뮤니티 아트’로 방향 전환이 이뤄졌다. 이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예술가로서의 삶이 변화한 한 사례이다.

김성규 시인은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다. 그는 ‘신동엽문학상’ ‘박영근작품상’ 등을 수상한 ‘주목받는 시인’이다. 2015년의 일이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목할 만한 작가상’을 만들었다. 이 상의 취지는 “한국작가 중 현재까지의 성과가 뛰어나고 앞으로의 문학적 성취에 지원이 필요한 우수 작가를 선정하고 지원한다”였다. 김성규 시인은 지원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당시 그는 왜 자신이 탈락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2016년 10월 언론보도를 통해서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문체부가 작성한 ‘2015년 연중 사업 관리 리스트(262명)’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김성규 시인은 2014년 6월2일 ‘문학인 세월호 시국선언(754명)’에 서명했다. 이 시국선언이 낙인이 되어 국가기구의 폭력적이고 부당한 제약이 그에게 가해진 것이다.

김성규 시인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이후 “작품 활동이 움츠러드”는 경험을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자신이 권유해 ‘문학인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고 했다. 앞으로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영향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김성규 시인이 말하는 ‘피해의 현재성’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래의 어떤 상황에서는 “더 큰 피해, 더 큰 공포와 화”를 불러올 것 같은 불안감의 지속을 뜻한다.

손혜정 대표와 김성규 시인이 문화예술인으로서 받은 피해 사례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피해자는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만 8931명에 이른다. 342곳의 예술인 단체도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지난 21일 한국작가회의 등 120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 손해배상 청구소송 결과가 나왔다. 재판부는 ‘국가가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에서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블랙리스트 사건이 국가의 ‘정책 범죄’였음을 확인시켜준 판결로 해석할 수 있다. 문화예술인들은 ‘블랙리스트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국가기구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하고 있다. 피해예술인의 심리치료를 통한 창작현장으로 복귀 지원,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한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의무교육 시행, ‘표현의 자유 예술인 재단’ 설립 등도 꼭 이뤄져야 할 후속 조치들이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문화예술계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후보자들은 문화예산 확대, 문화예술 평생교육,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공간 임대 등을 공약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문화예술의 진흥은 ‘제한 없이 상상하고,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공약에 ‘블랙리스트 사건 재발 방지와 피해 회복을 위한 후속 조치’가 꼭 포함되어, 문화예술인에게 ‘표현의 자유라는 날개’가 달리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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