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에게 해방구를 열어주자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원하는 대학을 못 간 많은 고3들과 취업 못한 수많은 젊은이들은 이번 설날에도 친척들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오미크론이 그들을 구해주었을까? 우리 사회처럼 나이가 비교 기준이 되는 사회, 경쟁이 심한 환경에서 10대와 20대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저만치 앞서 달리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신은 ‘이미 늦었다’고 생각해 일찌감치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현병호 교육매체 ‘민들레’ 발행인

언제부턴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말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것은 이들의 좌절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30~40대가 되어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면, 뭘 시작해도 늦지 않은 나이에 왜 그렇게 일찍 좌절했던가 후회하게 되지만 당시에는 그런 눈을 뜨기가 힘들다.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한 10대들에게 숨 쉴 틈을 주는 전환학년제는 오늘날 우리 교육 현실에 무엇보다 절실한 제도다. 졸업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허구한 날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 교육인가. 꽃다운 나이에 꽃을 피우기는커녕 나날이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들이 느끼는 좌절감은 또 얼마나 큰가. 서로의 인생을 낭비하게 만드는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대학교수들은 6년을 일하면 1년간 안식년을 갖는데, 학생들은 12년, 아니 16년을 앞만 보고 달리도록 요구받는다. 교수들에게 안식년은 학문의 깊이를 더하는 연구년이기도 한데, 학생들도 자기 삶의 방향에 대해 탐색하는 일 년 정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면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학생들을 위한 안식년의 필요성에 일찌감치 눈을 뜬 사회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제도화하고 있다.

몇 년 전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의 큰딸 말리아가 하버드대학에 합격하고도 바로 진학하지 않고 일 년 동안 갭이어 시간을 가진 것이 우리 사회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대학생들의 자퇴가 늘자 미국의 유수 대학들이 갭이어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일찍이 이런 제도를 공교육에 접목한 덴마크에서는 정규 과정과 별도로 전환기학교인 애프터스콜레와 시민대학 폴케호이스콜레를 두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전환학년제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확산 중이다. 2025년부터는 자유학기와 별도로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진로연계학기’가 새로 도입될 예정이다. 고1 과정의 전환학년제도 몇 년 전부터 시도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과 민간 대안교육기관이 함께 운영하고 있는 오디세이학교는 벌써 8년째에 접어들었고, 다른 시·도 교육청에서도 비슷한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아이들에게 한숨 돌릴 수 있는 틈을 주자.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왜 달리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한편 달리기를 포기하고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에게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에 눈뜨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인생에는 ‘인서울 대학’이라는 하나의 코스만 있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선착순 달리기를 해야만 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되면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을 자기의 리듬에 따라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틈새 시간이 모든 아이들에게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10% 아니 1%에게만이라도 숨통을 열어준다면 학교에서 시들어가는 많은 아이들이 생기를 찾을 것이다. 춤학교, 작가학교, 여행학교… 학교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보자. 중학교를 졸업하는 아이 100명 중 한 명만 이런 과정을 선택해도 5000여명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면 이후의 시행착오 과정이 줄어들 것이다.

1년 또는 한 학기 단위로 운영되는 다양한 배움터 1000개를 만들어보자. 인구가 우리의 10분의 1인 덴마크에는 250여개의 애프터스콜레와 70여개의 시민대학이 있다. 중·고교를 졸업한 많은 학생들이 이 과정을 거친다. 덴마크가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낮은 출생률을 걱정하기보다 이 땅에 태어난 아이들이 ‘이생망’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해방구를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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