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 임금과 대통령

“이후 대조선국 군주와 대미국 백리새천덕(伯理璽天德) 및 그 인민은 각각 영원히 화평하고 우애 있게 지낸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관의 첫 문장이다. ‘백리새천덕’은 ‘프레지던트’의 중국어 음차이다. 우두머리 백(伯), 다스릴 리(理)에 옥새와 하늘의 덕을 조합하여 의미도 담았다. 그 외에 두인, 방장 등이 번역어로 혼용되다가 중국에서는 ‘총통’으로 일반화되었다. ‘대통령’은 1850년대 일본 문헌에서부터 보인다. 기존 한자어 통령을 활용한 신조어다. 조선의 이헌영은 <일사집략>에 대통령이라는 말을 쓰면서 “국왕을 이른다”는 설명을 붙였다. 대통령을 임금과 같은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오늘날 공화(共和)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사람인데 어찌 임금이 있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도 우두머리가 없을 수 없으니 한 사람을 추대하여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우두머리로 삼을 때는 이름을 빌려주었다가 그 자리를 떠나면 평민과 동등하게 대한다.” 1912년 조긍섭은 공화정을 비판하면서, 군신의 의리가 철저한 개미만도 못하게 될 것이라고 개탄했다. 20세기에 여전히 공맹의 왕도정치를 신봉하는 시대착오로 치부될 만하다.

그런데 “아침에는 임금이었다가 저녁에는 동류가 되는 게 말이 되느냐”는 조긍섭의 지적은, 역으로 민주주의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말이기도 하다. 조긍섭은 이름과 권력을 주었다가 빼앗는 것이 의리상 합당하지 않음을 문제 삼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제도가 실은 구현하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간과해 온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만든다. 프레지던트가 의장이나 총장 등 일반에서도 사용되는 데 비해 그 번역어인 총통이나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에만 사용된다는 점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조긍섭은 1919년 고종이 승하했을 때 많은 이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상복 입기를 거부했다. 항복한 임금은 임금으로 예우할 수 없다는 결연함을 보인 것이다. 그가 강조한 군신의 의리가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국민이 부여하는 이름과 권력에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내려와야 하는 오늘의 대통령에게, 왕다워야 왕이라는 정명(正名)의 요청은 더욱 엄정하게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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